여름이면 한낮 기온이 38도를 오르내리면서도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디서나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습기가 없는데다가 바람이 있으니 그저 볕이 따가운 정도이다. 그늘에 들어서면 서늘해진다. 창문 하나 없는 게르에서도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비결이다.
평균 해발이 1500미터인 몽골 고원에서는 고도 차이에 따른 산곡풍이 분다. 낮에는 바람이 계곡이나 평원에서 온도가 오른 산꼭대기로 불고, 해가 지면 그 반대로 산에서 골짜기나 평원으로 분다.
몽골의 바람이 늘 고마운 것만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바람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따라 넷으로 나누었지만, 몽골의 바람은 12가지나 된다고 한다. 대체로 계절별로 보자면, 겨울을 지나 봄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부는 무서운 바람이 있다. 혹독한 한파를 몰고 오는 눈보라 조드는 죽음의 사자나 다름없다. 모든 걸 눈으로 뒤덮고, 얼려 버린다. 한겨울에도 바깥에 방목하는 몽골의 양과 염소들이 봄이 되면서 축축해진 진눈깨비를 맞았다가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며 수천 마리의 가축들이 집단으로 얼어 죽는 경우도 있다 한다. 심지어 양떼를 지키는 목부까지 죽는 일도 있단다. 조드가 불어오면 가축들이 먹어야 할 풀들이 얼어서, 마치 유리막으로 덮인 것처럼 되어 가축들이 굶어 죽게 된다. 2010년에는 조드로 인해 몽골 전체 가축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820만 두가 죽는 일도 있었다.
조드(Dzud)는 적당한 우리말이 없다. 유목민들이 살기 힘든 자연적 재해를 가리키는 조드는 여러 종류가 있다. 엄청난 눈을 몰고와 모든 걸 백색의 죽음으로 덮어버리는 ‘차강 조드(하얀 조드)’, 눈 없이 혹독한 추위로 몰려오는 ‘하르 조드(검은 조드)’, 비가 내리지 않아 풀들이 말라 죽는 ‘간 조드(가뭄 조드), 그 밖에도 때 이르게 추위가 몰려와 풀들을 유리처럼 얼려 버리는 ‘얼음 조드’.
어떤 조드든 가축이 먹어야 하는 풀을 죽이고, 가축이 죽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죽게 한다. 몽골 사람에게 조드는 악귀와 같다. 모든 것을 죽음으로 뒤덮어 버리는 조드 앞에 문을 걸어 잠그고, 그것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김형수 작가가 몽골의 장쾌한 역사를 깊이 있게 다룬 장편소설의 제목이 <조드>이다. ‘조드’는 몽골 사람들이 겪어온 고난이며,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봄이 된다고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같은 봄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고비사막을 지나 알타이를 넘어 몽골 고원과 만주 방향으로 날아오는 세고 건조한 봄바람은 또 다른 악귀이다. 고비 사막에서 시작된 바람은 알타이 산들을 넘으며 한 짐 지고온 사막의 모래들을 남고비에 내려놓는다. 켜켜이 날아온 모래들이 쌓여 산을 이룬다. 장장 240Km에 이르는 거대한 사구가 바로 그것이다. 모래를 내려놓은 바람은 황량한 몽골의 고비를 지나며, 거기 쌓인 고운 진흙 알갱이들을 끌어올린다. 이것이 한반도와 일본까지 날아가는 황사(黃沙)이다. 겨울에 눈이 적게 내릴수록 고비의 황사는 심해진다. 나노 단위로 나눌 만큼 미세한 고비의 점토가루들은 거센 바람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뒤덮고 심지어 태평양까지 건넌다.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으며, 집이 묻히고, 초원의 양들이 묻혀 죽을 판이다. 조드가 백발을 휘날리며 달려드는 악귀라면, 봄의 모래바람은 누런 머리를 흩날리는 마녀인 셈이다.
황사 바람을 막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몽골의 황야에 나무를 심고 있지만, 자연의 거대한 현상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써 심은 나무들도 바람에 실려 온 고운 점토 가루에 덮여 질식하여 죽고 만다니 참 고운 것도 지나치면 병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나무를 포기하고, 우선 바닥의 진흙을 붙들어 줄 덤불들을 심고 있다.
그러나 이 모진 바람들을 더하여도 몽골의 여름 바람은 거스름돈을 돌려받을 만하다. 여름에 부는 산들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다. 몽골을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초원의 숨결이다. 몽골의 바람을 폐부 깊숙이 받아들이는 여행자라면, 그 속살 깊숙이 깃들어 있는 온갖 허브들의 향내와 메뚜기 날개 소리와 말발굽 소리와 박하향을 듬뿍 뿌린 부채로 부쳐주는 듯한 감미로운 대기의 향취,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비단의 촉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없으며, 하닥을 매단 오워마저 없는 초원에서는 바람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키 작은 들꽃들이 바람의 오워이다. 초원의 풍향계. 일일이 이름을 불러 줄 수는 없었지만, 바람에 가냘픈 몸을 흔들리면서도 저마다의 빛깔로 꽃을 피우는 몽골의 들꽃들은 경이롭다. 짧은 여름에 피어나는 들꽃들이야말로 바람이 벗어 놓은 비단 꽃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