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개봉 다음날 심야로 영화 백두산을 보았다. 백두산 폭발로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했고, 익숙한 강남역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그 장면을 보니 맘이 아프다가도 뭔가 모르게 쾌감이 느껴졌다. 날 옥죄는 것만 같은 이 도시가 시원하게 무너지니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와 동시에 4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먼저 "영화 백두산처럼 강진을 만난다면?"에 답을 하자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 배웠고 지진에 대한 교육이라고는 책상 아래로 들어가는 것 밖에 배우지 못했다. 지진의 강도가 어떠한지 몸으로 느껴보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지진이란 내 인생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2015년 4월 25일
지진은 나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그날의 카트만두의 모습이다.
그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네팔의 소식을 알고 있었는지 내가 알 길은 없다. 주위 친구들이 잘 모르는 거 보면 네팔의 대지진은 한국에서 큰 이슈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의 강도는 리히터 규모 7.9였다. 규모 1의 차이가 32배 정도 강도 차이가 난다고 하니 0.1도 꽤나 큰 차이일 것 같다. 카트만두는 고층 건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영화와 같은 스펙터클함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 까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충분한 충격이었다.
영화를 보면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인창 대위(하정우)에게 개가 "멍멍멍 멍" 짖는다.
경험적으로 이제 지진이 일어나겠다 싶었다. 지진이 나면 동물이 먼저 안다. 네팔에서도 지진이 나기 전 엄청난 무리의 비둘기가 굉음을 내며 날았다. 비둘기가 날자 1초가량 지났을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는 지진이 나자 사람들이 살기 위해 여기저기로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7.9의 지진에서는 절대 뛸 수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지진이 멈추기를, 내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게 땅이 흔들리고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다. 다른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던 찰나에 지진이 났고 놀란 나머지 손으로 셔터를 꾹 눌러 몇 장의 사진이 남아있을 뿐이다. 정말 웃픈 순간의 기록이다. 첫 진동이 끝나고 바라본 카트만두 시내는 먼지가 뿌옇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자 뭔가 큰일이 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7.9라는 수치는 지진이 나고 며칠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실 듣고도 이게 지진으로서 큰 규모라는 것도 바로 알지 못했다. 다만 흔들림이 크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너진 건물, 울고 있는 사람들, 길가에 앉은 사람들 그리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내 심장이 지금 내가 겪은 일이 내 생명에 큰 위협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급하게 찾아간 숙소는 이미 셔터가 내려가 있었고 주인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내 모든 짐들이 이 건물 4층에 있는데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다행히 주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짐을 찾으러 4층으로 올라갔다. 이때가 지진이 나던 순간보다 더 긴장되었던 순간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1분마다 여진으로 땅이 흔들렸고 언제 이 건물이 무너질지 알 수 없었다. 미친놈처럼 4층까지 뛰어 올라가 방문을 열려는데 열리지 않았다. 무언가 떨어져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밀쳐 연 방안은 더욱 날 긴장시켰다.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백팩에 쓸어 담고 뛰어 내려왔다. 아래 사진에 있는 "Annapurna guest house"가 내가 묵던 숙소다. 보다시피 이미 옆 옆 건물은 무너졌다. 주인장이 올라가지 말라고 말린 이유가 짐을 챙기고 내려와서 보니 눈에 들어왔다.
짐을 챙긴 우리는 갈 곳을 잃었다.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어제 카트만두에 도착했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허탈하기도 했다. 당장 오늘 잘 곳도 먹을 음식도 없었다. 심지어 유심칩 조차 구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너무나 막막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한참을 걷다 지쳐 공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친구가 wifi를 잡아보겠다고 wifi를 켰는데 "unicef-guest"라는 wifi가 잡혔고 친구는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를 떴다. 한 15분가량 지났을까 친구가 빨리 짐 싸서 가자고 했다. wifi를 따라가니 유니세프 사무소가 있었는데 영어가 안돼서 대화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짧은 영어지만 가릴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니세프라고 하면 위기에 처한 모두를 감싸줄 것만 같은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 곳은 UN 직원들만 받아주고 있었다. 정말 정말 영화 같지만 당시 나와 친구는 UN군 소속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고 엄연히 UN 직원이었다. 우리 신분을 확인한 후 이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곳 역시 지진의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물론 아무런 보호막 없이 지냈을 여행자들 그리고 네팔 주민들에 비해서는 너무나 감사한 환경에서 이 재난을 지낼 수 있었음에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지진 다음날 비가 내렸고 저 높은 담벼락 너머 들리던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유니세프라서 그런지 텐트와 간단한 비상식량은 구비되어 있었다. 군인이라는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더라. 친구와 나는 다른 UN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텐트를 쳤다. 덕분에 이 곳에서 우리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 사진은 첫날의 모습이라 텐트가 하나지만 시간이 지나 저 잔디밭은 발 디딜 틈 조차 없이 네팔 각지에서 모여든 UN직원으로 가득 찼다. 물론 한정된 식량도 점점 부족해졌다. 친구와 나는 해가 뜨면 공항과 대사관을 다니며 네팔을 벗어날 티켓을 구하러 다녔다.
**뒷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룰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