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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jaewon Feb 10. 2019

우연히 창경궁을 가보셨나요

혜화동 프로젝트



이 동네를 열심히 찍겠다고 다짐했지만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출근 길에 묵직한 DSLR을 챙기는 건 여간 성가신 일입니다. 회사에 가방도 매고 가지 않은 저에게는 더욱 성가시면서 신입사원이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게 참 눈치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성가신 카메라를 챙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가방을 매고 출근했습니다.



그 날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탈때만 해도 "오늘은 집 들어가기 전에 꼭 사진 찍고 들어가야지"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혜화역에 내려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는 순간 왠지 카메라가 가볍더니 베터리를 안 가져 왔더라고요. 이게 마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가 봅니다.



보자마자 카메라를 들었던 순간  by jaewon.im



다음날 퇴근하고 헤화에 내리자 마자 눈이 내리는겁니다. 함박눈처럼 예쁜 눈은 아니였지만 이 동네에서 마지막 금요일을 보내는 저에게는 충분히 아름다운 눈이었습니다. 고민없이 카메라를 꺼냈고 이 참에 동네 한 바퀴 돌고 싶어 창경궁까지 걸었습니다. 기분 좋을 때면 한 정류장 전에 내려서 노래부르며 걷던 길이라 언제 이 길을 또 걸을까 싶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창경궁에 도착했더니 올해부터는 야간 개장이 상시 개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샤살라 by jaewon.im



여행을 많이 다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한국처럼 관광지 입장료가 저렴한 곳도 없습니다. 심지어 야간개장 창경궁을 구민 할인을 받고 500원에 입장했습니다. 500원에 이런 호화를 누릴 수 있다니 혜화에 방문하시면 조금 걸어서 창경궁도 꼭 방문해보시길 바래요. 야간에는 예쁜 등도 무료로 빌려준답니다.




마침 내 손에 카메라가 있었고 마침 그 순간 눈이 내렸고 마침 야간 개장을 했고, 또 마침 그 순간 예쁜 커플이 내 눈 앞에 있었습니다. 정말 끝 없는 우연들이 한 순간 한 장소에 저를 위해 모여준 것만 같은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혜화에 살면서 자주 갔던 창경궁인데 그 날이 무슨 날이길래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한 순간 제 앞에 딱! 모여있었을까요.



야간 기행 by jaewon.im



우연히 수많은 것들이 동시에 모인거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제서야 눈에 보인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한가지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와 동시간에 어디선가 웃고 울고 행복해하며 살아갈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거든요. 일상으로 돌아와 잠시 여행지를 잊고 지내다보면 현실로 존재하는 그 곳이 저에게는 비현실로 느껴지곤 합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다가 제가 방문한 그 순간 우연히 존재했던 것처럼이요. 제가 떠나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고요. 참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전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 날 창경궁에서 제가 우연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도 원래는 그 자리에 다른 형태로 늘 존재하던 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알아봤을 뿐이겠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시인은 구구절절한 저의 말을 딱 한 문장으로 말해주네요.






이번 혜화동 프로젝트를 하면서 6년간 보지 못했던 내 동네를 알아가는 것도 이미 존재했지만 저에게만 존재하지 않았던 모순과도 같은 공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모순 같은 공존을 견디지 못해 28개국 90여개 도시를 다녔지만 여전히 견디지 못할 공존이 저에게는 많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요.



우연히 어딘가 가게 된다면 모순과도 같은 공존을 만나기를 바래요. 짜릿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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