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by 임유진

초가집의 흙 담벼락 너머로 태평소 소리가 들리운다. 피리보다는 진중하고, 트럼펫보다는 날아오르는 소리. ‘덩 기덕 쿵 더러러러 쿵 기덕 쿵 덕’인가 싶더니 어느새 ‘덩 덕 쿵덕 쿵 덕 쿵덕’으로 장단이 빨라진다. 굿거리장단에 덩실거리던 발걸음이 자진모리장단의 취기 어린 선율에 바빠진다. 초가집을 둘러 가는 길이 아득해 마음은 이미 담벼락을 타넘는다. 공연장에 다다르니 상모판굿이 한창이다. 태평소의 선율 위로 장구와 북, 꽹과리와 징이 심장을 몰아간다. 휘모리장단에 휘둘려 심장 박동이 휘몰아친다. ‘덩 덕덕쿵덕쿵’.


속초시립박물관 야외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풍물단의 가락은 관광객의 발목을 공연장으로 몬다. 평소에는 전혀 관심 없던 풍물놀이에 돌연 사로잡힌다. 분망하게 흘러가는 한판 놀음에 녹아들고 보니 그제서야 판이 보인다. 단상 위에 홀로 우뚝 선 채 울리는 태평소가 대장인 줄 알았는데 ‘찐’ 대장은 따로 있었다. 징과 북과 장구와 소고 사이에 둘러싸인 꽹과리가 장단에 변화를 주며 가락을 이끈다. 꽹과리의 장단에 맞춰 태평소의 선율이 쌓이고, 징이 흥을 두드리면 장구와 북이 이제 막 홉뜬 흥취를 북돋는다. 장단에 귓불을 잡힌 채 끌려가는 동안 풍물단의 발재간은 더욱 유려해진다. 꽹과리가, 징이, 장구가, 북이 각자 쉴 틈 없이 흙을 밟고 돌면서 원을 그린다. 마당에 날리는 흙먼지가 모두의 흥취에 달라붙는다.


꽹과리를 든 ‘상쇠’가 하얀 털이 수북이 달린 부포상을 쓰고 고갯짓을 한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공작새가 날개를 펼쳤다 접었다 끼를 부리는 것 같다. 부포짓을 하는 상쇠는 그 자체로 꽹과리가 되어 울리고, 공작이 되어 깃털을 놀린다. 완급 조절이 완벽한 부포 놀음에 관객 모두가 놀아났다. 상쇠가 비켜나자 버나 재비가 등장해 버나 돌리기를 시작한다. 버나를 공중으로 던지고 가랑이 사이로 돌리고 담뱃대를 길게 뻗어 올려 돌린다. 가락이 장단을 맞추며 버나의 회전을 고조시킨다. 돌고 도는 어지러운 세상은 이때만큼은 돌리고 돌려지는 버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버나가 버나 재비의 손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고 한숨 돌리는 틈에 열두 발 상모꾼이 나타나 관객석까지 열두 발의 긴 상모를 휙 뻗는다. 상모꾼이 열두 발 상모를 가지고 놀며 부리는 춤사위가 마치 브레이크 댄스 같다. 비트를 쪼개듯 장단을 쪼개는 조선판 비보이가 물러나자 흰색 줄을 매단 채상을 쓴 소고 재비가 등장한다. 소고를 아이 장난감 같다고 얕보다가는 큰코다친다. 소고 재비는 소고를 연신 쳐내며 곡예에 가까운 상모 돌리기로 마당을 몇 바퀴씩 돈다. 돌려차기 하듯 몸을 뒤집으며 뛰어 돌면서 상모를 돌리고 북과 징과 장구와 꽹과리를 품고 더 큰 원을 그린다. 관객들이 간신히 매 놓은 마음마저 기어이 동낸다. 상모꾼들의 신명나는 한판 놀이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품은 우주 같다.

우주를 품고 공연장을 떠나는 풍물단에 관객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표표히 휘날리는 긴 상모가 퇴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덮어주는 장면에 어쩐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곳에서 매일 연습과 공연을 반복하며 전통을 보전하는 사람들. 나이 든 상쇠의 여유로운 부포춤과 젊은 상모꾼의 에너지 넘치는 상모춤이 공존하는 곳. 전통의 더께를 진 신구의 조화가 찬연하다. KBS 1 채널에서 명절에 일회성으로 방영되는 특집 방송쯤으로 여기던 것을 누군가는 평생의 업으로 삼아 지켜오고 있었다.


공연장을 나와 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낯익은 수돗가가 보인다. 시멘트로 다져 놓은 네모난 수돗가에 무쇠 펌프와 대야, 그리고 바가지가 놓여 있다. 우리 할머니의 말로는 ‘샘’. 시뻘건 고무 다라이와 양철 세숫대야가 있던 예전 할머니 집의 샘이 눈앞으로 찾아들었다. 아빠가 펌프질로 고무 다라이에 받아 놓은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대야에 담아 끌어당기면 시멘트 바닥에 양철 대야가 쓸려 떠들썩한 소리를 냈다. 귀를 긁는 소리에 대야를 당기기보다는 쪼그린 양 다리를 어기적거리며 대야에 바싹 붙어 앉았다. 벌겋게 녹슨 무쇠 펌프를 마냥 신기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 지금껏 시(市)에서 살아온 내게도 친숙한 이것들이 내 아이들에게는 박물관 전시품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이라니 이 또한 시간의 더께인가 싶다.


대야에 있는 물을 한 바가지 퍼 올려 펌프 안에 부었다. 마중물. 땅 속 샘물을 마중 나가서 불러온다는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했다. 마중물이 다 빠지기 전에 샘물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 기억에 아빠는 손쉽게 물을 콸콸 쏟아져 내리게 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코끼리 코 같은 펌프 줄기로 쫄쫄 흐르는 물을 봤다. 한 바가지 물로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샘물을 끌어올리는 일이 어쩐지 풍물단의 공연 같다고 느껴졌다. 마당 가장자리의 수돗가, 샘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들이붓는 마중물처럼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전통을 전승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중물을 붓는 사람들. 너른 땅 속을 흐르는 지하수와 섞여 드는 마중물처럼 그들의 신명이 사람들 마음속 깊숙이 흐르는 흥취를 끌어올린다. 풍물단과 관객들이 섞여 흥겨움이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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