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까맣고 광막한 우주에서 모든 존재는 한 점의 먼지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인간이라 불리우며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하 작가는 「작별인사」에서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한 듯하다. 필멸성이 전제조건인 인간. 그렇기에 이미 태어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보았을 법한 미래 세계를 그린 이 소설은 통일된 한국, 평양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철이는 인공지능 로봇을 연구하는 연구소, 휴먼매터스의 연구단지 안에서 안온한 생활을 영위한다. 바깥은 분명 존재하지만 철이의 삶은 휴먼매터스의 캠퍼스 안에서만 이뤄진다. 아버지인 최박사와 천자문부터 고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질과 문명을 아우르는 데 중점을 둔 홈스쿨링을 하며 견문을 넓히지만, 캠퍼스 안에서만 생활하는 철이의 삶은 어쩐지 반쪽자리 같다. 통일 정부는 평양과 서울을 제외하고 도태된 농촌과 소도시의 기능을 그대로 잠재웠다. 휴먼매터스 안의 적요한 삶은 바깥에서 벌어지는 풍랑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약간의 권태로움을 느끼던 어느 날, 철이는 아버지의 산책길을 몰래 쫓아가다 ‘무등록 휴머노이드’라는 판정을 받고 수용소로 끌려간다. 태어나 지금껏 인간이 아닌 적이 없었던 철이. 먹고 자고 배설하고, 감정의 종류대로 기분을 느끼고, 음악과 소설을 읽으며 인간의 삶을 향유하고, 심지어 꿈마저 꾸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철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용소 안에는 용도를 잃고 폐기처분당한 인공지능 로봇들이 죄수처럼 모여 있다. 폐가전이 언덕처럼 쌓여 있는 고물상의 움직이는 교도소 버전이랄까. 수용소 안의 휴머노이드들은 그 발전 단계를 보여주듯 외관과 능력이 차등적이다. 철이는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최신형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였다.
인간과 한눈에 구별하기 어려운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필요한 존재일까. ‘용도’를 잃었다는 것은 폐기의 당위를 설명하기에 충분조건인 것일까. 필멸성. 존재는 반드시 소멸한다는 예외 없는 원칙이 인간을 인간적이게 하는 동시에 비인간적이게 한다.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마음이 돋아나고, 돋아난 마음에서 감정이 꿈틀거린다. 직박구리의 죽음을 목격하고 요동치는 감정의 이름을 정의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 ‘철이’의 모습을 보며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인간과 가장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사이에서 인간의 본질은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주인공 ‘철이’의 이름은 기계를 상징하는 쇠붙이로서의 철과 인간의 본질을 대변하는 철학으로서의 철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한 장치가 아닐까.
철이가 수용소에서 만난 ‘선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같지 않은’ 복제인간이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으로서 개별적 의식과 의미를 탐구하고 추구한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이기에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의미 있는 일’이 있다. 생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으로 윤리의식은 쓰레기통에 버린 채 클론을 생산하여 장기를 빼내고 영생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우리들의 삶이 자연적인 결말을 맺을 때까지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수용소에 갇혀 캠퍼스 안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그리워하던 철이는 점차 알을 깨고 나온다. 선이가 주장하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의식과 우주정신으로의 화합, 그리고 ‘달마’가 주장하는 클라우드에 흡수된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영생 사이에서 철이가 찾은 본질은 자아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내가 완벽하게 기계의 흉내를 내고, 그러다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 (p.69)
개별적 의식이 없는 존재는 존재로서 무의미하다. 집단의식에 흡수되어 디지털 구름 상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것을 축복받은 영생이라 할 수 없다. 육신이라는 매개를 통해 개별 의식을 향유하는 유한한 삶이 인간다움의 전제조건일 것이다. 달마의 주장처럼 인간의 삶은 시지프스가 굴리는 돌처럼 힘들고 덧없으며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겹게 굴린 돌을 다시 땅으로 굴려 보내기 위해 정상에 선 그 찰나, 그 잠깐의 휴식과 희열이 시지프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시즈프스와 달리 그 끝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은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고 기계마저 ‘비활성화’라는 형태의 죽음을 맞는다. 그럼으로 인간인 우리는 개별적 자아를 바탕으로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의무가 있다. 생은 유한하다. 당신의 삶이 이어지는 동안 의식의 씨줄에 순간의 의미를 날줄로 엮어 자신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바란다. 작별인사를 건넬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