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라는 단어를 이루고 있는 각 음절의 한자는 쉴 휴(休), 틈 가(暇)이다. 휴가란 이름 그대로 쉴 틈, 쉴 겨를을 뜻한다. 회사를 다니든 학교를 다니든 전업주부의 삶을 살든 인간은 누구나 틈틈이 쉴 틈이 필요하다. 나만 해도 ‘엉덩이가 가볍다’는 말을 들을 만큼 온종일 집 안을 종종거리지만 틈만 나면 쉴 겨를을 찾아 드러눕고 본다. 휴식욕은 식욕만큼이나 인간의 기본적 욕구다. 인간은 목줄처럼 메인 일과에서 놓여나고 싶다. 이토록 틈틈이 쉬고 싶은 인간들의 휴가가 어째서 ‘여름휴가’라는 한 단어로 응집되는 것일까. 여름과 휴가가 각각의 단어임에도 붙여 쓰는 합성어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마치 휴가는 여름에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쉴 겨를은 여름 한정으로 공인된 것처럼.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거스르고 일 년 중 한때, 성수기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여름휴가철은 그야말로 무자비하다. 관광지마다 사람들이 몰리고 당연한 듯 성수기 요금이 따로 존재한다. 일상에서 놓여나기 위해 떠나는 휴가가 품과 돈이 드는 또 다른 과제가 된다. 어쩐지 휴가라는 이름이 무상하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인 6월 28일,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 참석해 대기업들에 “고물가 상황을 심화할 수 있는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제부총리가 쏘아 올린 발언은 연일 도마에 오르고 있지만, 도마 위에서 칼질을 당하는 것은 어째 목소리에 힘이 없는 노동자들뿐이다. 인플레이션 물결 속에 현 정부는 기업에 법인세 감면, 규제 완화라는 선물을 안겼다. 윗물이 넘치면 아랫물로 물줄기가 흘러내릴 것이라는 철 지난 낙수효과를 기대하면서. 그렇다면 경제부총리가 기업인들 앞에서 임금 인상 자제를 부탁한 것은 낙수효과란 없다는 반증이 아닐는지. 공급 중시 경제학의 원리에 따라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풀어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유도하겠다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잡혔던 발목이 풀린 기업은 혜택의 파도를 타고 넘실거린다. 기업이 파도를 타고 자유롭게 항해할 때 노동자는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친다. 기업은 춤을 추는데 노동자는 어째서 울고 있을까?
노동자의 임금 인상 자제를 통해 물가 안정을 취하려는 정부의 미욱한 스탠스에도 남편의 회사에서는 임금·단체협약(임단협)이 한창이다. 어쩌면 노동자들만 한창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는 이미 확고한 기준과 대응 방침이 세워졌을 것이다. 13년 차 직장인인 남편은 올해 임단협에 간접적으로 참여 중이다. 대의원으로 활동 중인 회사 동료에게 생산직 노동자의 권리 증진이나 노사협약 같은 것들에 대해 배우고 있다. 대학 시절 등록금 투쟁조차 해 본 적 없는 남편에게는 혁명이나 마찬가지다. 순일한 남편에게 변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궁금해하는 내게 남편은 올해는 좋은 때, 좋은 곳으로 여름휴가를 가자는 말로 답한다. 무자비한 성수기 요금을 피해 물놀이하기에는 덜 덥거나 조금 추울 때 휴가를 떠나던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가 올해는 극성수기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번 휴가는 속초에 새로 생긴 호텔형 리조트로 가고 싶지만, 울산바위처럼 둘러쳐진 회사의 방패에 두 자리 수의 임금 인상 요구안을 제대로 들이밀 수나 있을는지. 순정한 노동자들은 회사가 쳐놓은 방패를 애써 모른 척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울 생각에 격양되었다. 불 보듯 뻔한 결과일 테지만 한편으론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남편에게 수시로 연락하는 대의원이라는 회사 동료가 체 게바라일까, 스탈린일까 자못 궁금해진다.
물가 상승을 노동자의 임금 동결로 해결하려는 것은 불공정한 희생일 뿐이다. 노동자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컨베이어 벨트 한편에 있는 규격품이 아니다. 자본을 투자한 기업이 이윤을 획득한 만큼 노동력을 제공한 노동자는 합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기업의 이윤 창출에 노동자는 소모품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이라는 실재적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을 등한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육체노동은 ‘배움’없이 몸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교육 수준을 기준으로 저임금 육체노동자와 고소득 전문가를 가르는 것이 마치 풍토병처럼 고착되었다. 그러나 건장한 몸은 자연적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노동력, 즉 일할 능력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받고 삶을 영위해야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생산품을 파는 것처럼 노동자 역시 기업에 자신의 유한한 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그 대가가 쥐꼬리 같은 임금 인상률이라면 이는 노동자의 자본을 착취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온당한 임금 인상 요청이 배움을 게을리한 인간의 파렴치한 요구로 탈바꿈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먼지처럼 부유하는 ‘공정’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바로잡혀야 되는 것 아닐까.
지난 5월, 연세대 학생 세 명이 대학 내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집회 중인 청소노동자를 고소했다. “청소노동자들의 시끄러운 집회로 학생의 고유 권리인 수업권을 침해받았다”는 것이 소송의 골자다. 수업 시간 교수의 목소리를 한 음절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귀가 어째서 시위를 통해서밖에 외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는 열리지 않는 것일까. 결국 본질의 문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생각해야 할 때다. 우리 사회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톱니바퀴는 톱니의 빈틈이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힘으로 동력을 전달한다. 우리 사회의 필수 노동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은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의 한 부분을 맡고 있다. 톱니바퀴의 이가 하나라도 빠지면 바퀴는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에너지 전달이 불가능하고 남은 톱니들은 마모된다. 고소를 감행한 학생들은 톱니 하나의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다. 지성의 전당에서 ‘배움’을 행하는 자신들은 장차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톱니바퀴가 될 것이라 확신하므로. 다른 톱니가 겪는 불의는 보이지 않고 자기 앞에 마주한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 어긋난 공정 감각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s)」이란 저서에서 ‘사회에 꼭 필요한 육체노동이 있는데 이 노동자들이 일주일만 일을 안 해도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일자리가 전체의 40%라는 그의 주장은 그 직업군의 톱니바퀴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필수 노동자’는 현대판 카스트제도의 가장 낮은 칸에 있다. 원청에서 일하지만 원청과는 무관한 하청업체 소속으로 비정규직에 저임금이며, 그들의 근로계약서에는 복지 혜택이라는 것은 한 줄도 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연세대 청소노동자의 업무 실태에 연세대 측은 용역업체의 계약 문제라며 손쉽게 선을 그었다. 학생들이 수업권 침해로 고소해야 할 대상은 비싼 등록금을 받고도 학교 안의 노동 실태를 방만하게 관리한 학교이다.
도심 속 버드 스트라이크를 본 적 있을까. 매일 2만 마리의 새가 고층 건물의 유리창과 투명 방음벽에 부딪쳐 죽는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 한복판에서 매일 벌어지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크게 회자되지 않는 이유는 유리창이 깨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지 않아 새들만 고요히 죽는다는 것이다. 2019년 8월, 찜통 같은 더위에 에어컨은커녕 창문 하나 없는 서울대 지하 휴게실에서 청소노동자가 사망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상아탑이라는 서울대에서 벌어진 이 참사는 2021년에도 되풀이되었다. 우리나라만큼 공중화장실이 깨끗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화장실의 청결을 유지하는 이들은 우리 사회의 유령이다. 통상 일주일간 보장되는 여름휴가는커녕 일과 중 휴식시간을 보낼 제대로 된 휴게실조차 없다. 내밀한 볼일을 보는 사람들 옆 칸에서 대걸레와 나란히 서서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저임금 육체노동자에게는 이 같은 비인간적인 처우가 당연한 것일까. 한 개인이 가진 이야기를 전혀 모른 채 배움 앞에 나태했던 자들의 개인적 일이라 치부하며 그들의 노동권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유리창은 깨지지 않고 새들만 고요히 죽는다. 분노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린다. 이대로라면 새들만 적요하게 죽어가는 도심 속 버드 스트라이크가 비행기 사고를 일으키는 버드 스트라이크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용히 그리고 무참히 죽어간 새들은 곧 우리 사회가 타고 있는 이 비행기를 공중에서 떨어뜨릴 것이다.
여름내 창틀 앞에 겨우 걸쳐있던 햇살이 어느샌가 창틀을 훌쩍 뛰어넘어 거실 안까지 들이친다. 늦저녁 바람이 시원해 잠들기 좋다고 생각했더니 어느 틈에 ‘처서’가 지났다. 생활 뉴스 카테고리에서 대충 훑어볼 법한 절기가 이토록 일상의 대종을 이룬다. 인견 이불은 빨아 널고 톡톡한 이불을 꺼내 펼쳐 놓았으니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니 ‘여름휴가’라는 말도 어느새 시들해졌다. 좋은 때, 좋은 곳으로 여름휴가를 가자던 남편의 포부에도 우리의 여름휴가는 지난해처럼 처서가 지난 날짜로 예약했다. '가을 휴가'가 된 것이다. 임금 인상률이 기대 수치의 2/3에 그쳤기 때문이다. 몇 개월 동안 공들인 임단협을 마무리하고 기대했던 여름휴가에 대해 한 가지 이루어진 것은 속초라는 장소뿐이다. 그럼에도 이 휴가가 마냥 기다려지는 것은 말 그대로 ‘휴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여름의 열기와 물가가 절절 끓어오를 때 떠나는 극성수기 ‘여름휴가’를 원한 것이 아니다. 일상의 터전을 떠나 일과에서 잠시 놓여날 수 있는 ‘쉴 틈’을 원한 것이다. 육체노동을 하든 정신노동을 하든 하루의 일과를 묵묵히 헤쳐 나가다 힘에 부칠 때 당연하게 쉴 틈을 보장받는 것. 보장된 쉴 겨를의 기간을 여상하게 쓸 수 있는 사회를 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