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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Feb 26. 2024

껍데기는 가라


 귤은 겨울을 데리고 온다. 과일가게 앞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탑처럼 쌓아 올려진 귤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겨울이 온 것을 눈치챈다. 귤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전언이다. 귤은 이른 도착을 망설이는 겨울의 수줍음을 모르는 척 계절을 재촉한다. 빙수 얼음 같은 눈이 날릴 때는, 이미 겨울은 현재완료 진행형이다.


 주황색 타원구를 조심스레 돌려가며 야들한 껍질을 신중하게 만져본다. 알맹이가 몰랑하면서도 야문 데가 있는 녀석으로 골라 든다. 이때 손가락으로 안마하듯 귤을 조몰락거리는 것은 금지. 곧바로 꼭지 옆에 엄지손톱을 찔러 넣어 살포시 껍질을 깐다. 초면에 다정한 손길도 없이 옷부터 벗기는 것이 무례하지만, 꼭지 옆에 엄지손톱을 찔러 넣으면 두꺼운 귤껍질이 손톱 안을 파고들어 생경한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다정한 손길은 귤의 긴장을 풀어 기껏 고른 야문 알맹이를 흐무러지게 하고 귤락마저 다 내어주게 한다. 귤 본연의 새콤함은 미미해지게 하고 달콤함만 취하겠다는 이기적인 손길이다. 무례할지언정 알맹이 본연의 모습을 지켜주고 실오라기를 걸쳐두게 하는 거친 손길이 오히려 신사적일지도.     

 

 귤락의 보호를 받은 알맹이는 입안에 넣고 깨물었을 때 그제야 발랄하게 통통 터진다. 새콤함과 달콤함을 조화롭게 부려놓은 맛이다. 이처럼 껍질의 역할은 알맹이가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벗겨진 이 귤껍질은 제 소임을 다한 듯하다.


 알맹이가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면 소임을 다한 껍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벗겨진 껍질들의 갈 곳을 생각해 본다. 탈피 후 본체를 떠나는 껍질들의 마음을 가늠해 본다.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은 제 소임을 다한 뒤에 홀가분하게 떠났을까? 내 알맹이 본연의 모습은 내 껍질이 마음 놓고 까질 수 있는 상태였을까? 빗겨 난 생각들은 어김없이 중심으로 향한다.     


 귤껍질과 함께 부유하던 생각들은 귤을 일곱 개째 까먹자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공기 중에 멈췄다. 횡경막이 부풀어 오르고 동시에 단단한 껍데기가 족쇄처럼 가슴을 옥죄었다. 크게 숨을 뱉고 귤락이 묻은 손을 대충 털고서 윗옷을 벗었다. 양팔을 등 뒤로 돌려 자물쇠처럼 걸어 놓은 후크를 풀었다. 사방에서 쓸어 모아 껍데기 안에 가둬 놓은 얄팍한 껍질은 그제야 숨을 쉬며 훌렁 본 자리를 찾아 내려간다.      


 여고 졸업을 앞두고 돌린 롤링페이퍼에 ‘우리 반 최고 왕가슴’을 타이틀로 부여받으며 친구들 앞에서 미스코리아 진인 양 인사를 했던 내 가슴은 아이를 낳은 후 박약한 모성으로 대변되었다. 첫째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 근근이 나오던 젖은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백일이 되던 때 고장이 난 듯 멈췄다. 그 이후로 알맹이는 천천히 사라지고 껍질만이 추락한 듯 가슴 밑의 위치에 남았다. 알맹이를 잃은 내 가슴 껍질은 흐무러진 알맹이의 찌꺼기를 다시 주워 담느라 여기저기 기워졌다. 껍질은 추락을 못마땅히 여기고 기운 자국을 흉하게 여기는 본체에 의해 다시 와이어로 무장한 껍데기 안에 갇혔다.     


 제 한 몸을 다 바쳐 보호하고 지켰으나 무른 알맹이가 나왔을 때 내 껍질들이 느꼈을 망연자실함이 전해진다. 흐무러진 알맹이가 참담해 내 껍질들은 벗겨졌으나 떠나지 못하고 내 몸 도처에 산재했다. 알처럼 애지중지 품어 온 알맹이를 잃고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는 껍질들의 절규를 못 들은 척 나는 그것들을 단단한 껍데기 안에 가뒀다.     


 얼마 전 여행지의 호텔 정원에서 조각상들 사이를 걷는데 딸아이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 호텔은 좀 이상해. 조각상들이 다 좀 야해.”

 그제야 무심코 지나친 여신들의 풀어헤친 앞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엎어놓은 밥그릇처럼 동그랬다.

 “이건 그런 잣대로 보면 안 돼. 예술품이잖아.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인…. 아, 그런데 엄마 가슴도 저렇게 동그랗게 컸었는데. 예쁘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내뱉는 나를 두고 아이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 걸었다. 잰걸음으로 따라붙는 나에게 아이가 창피한 듯 말했다.

 “엄마는 밖에서 그런 말을 크게 하면 어떡해?”

 아이의 말은 나의 교양을 제멋대로 가름했다. 가슴의 흥망성쇠가 어쩐지 정신의 쇠락까지 멋대로 가닿았다. 알맹이를 잃은 가슴 때문에 정신의 알맹이도 잃어버린 양.     


 서양 배처럼 내려앉은 가슴 껍질을 쇠락한 어느 왕조에 비유하면 심한 비약일까. 쇠락한 왕조 같은 가슴도 모자라 한순간 교양 없는 엄마로 전락한 것이 억울해 아이에게 웅변했다.

 “가슴 이야기가 어때서? 가슴은 누구나 가진 보편적인 건데? 왜 쉬쉬해야 해? 보편적인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그리고 엄마 가슴 진짜 크고 동그랬어! 너희들한테 열심히 젖 먹이느라 이렇게 축 늘어진 거라고!”

 예술과 보편, 교양의 상관관계까지만 항변하려던 것이 어째서 운명론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간신히 붙들어둔 교양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속 시원히 소리친 순간 내 알맹이의 소임을 번뜩 깨달았다. 다음 세대의 인간을 이 세계로 데려온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알맹이를 짜내어준 내 가슴의 소임을. 우주의 먼지로 자유로이 유영하던 그들을 굳이 이 세계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책임을 내 알맹이는 충실히 진 것이다.     


 소임을 다하고 남은 다정한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어느 왕조의 흥망성쇠처럼 풍요로웠던 내 가슴은 껍질을 까고 젖을 뿜어내고 쇠하였다. 그러나 껍질은 안식을 택하지 않았다. 남은 찌꺼기와 유착하여 성하지 못한 전체 알맹이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여전히 덮어주고 있다. 우주의 먼지에 대한 알맹이의 남은 소임을 위해 여태껏 내 곁에 남아 애쓰는 그것을 무용하게 여겨 무장한 껍데기 안에 쑤셔 넣은 나의 무정함이 아연하다.     


 다시 여행지에서의 밤을 떠올린다. 쳐진 껍질을 누가 볼세라 수건으로 앞섶을 가린 채 노천탕 안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온천물이 맨몸을 휘감고 밤하늘의 별이 샹들리에처럼 눈앞까지 내려왔다. 단단한 껍데기에서 벗어난 나의 맨 껍질은 뜨끈한 물속에서 노곤하게 흐트러졌다. 둥실 떠오르며 자유로이 유영했다. 무심하게 쓰레기통에 버려도 되는 것은 탈피 후의 껍질이 아니었다. 버릴 것은 끝끝내 다정한 껍질을 덧씌운 무정한 껍데기다.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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