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은 구미의 원도심이다. 그럼에도 그 일대에서 가본 곳은 ‘삼일문고’와 그 주차장이 전부다. 구미에서 15년째 살고 있는 이방인에게 원평동은 그 정도의 동네다. 금오시장이 도시재생 지역으로 선정되고, 그곳에 오래도록 거주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원평동의 골목을 처음으로 걸어보게 되었다. 현란했던 과거를 투영하듯 큼직한 간판들이 빈틈없이 붙어 있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판들의 헤진 모서리가 이곳이 구도심으로 내쳐진 지 한참이 지났음을 알려준다. 식당 하나를 지나면 모텔, 모텔 두 개를 지나면 사행성 게임장이 도열한 골목들이 왜 그동안 이 동네에 올 일이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소슬한 골목들을 지나 그나마 낯익은 서점의 뒷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적십자 상호 밑으로 ‘원평동 경로당’이라 쓰인 현판이 붙어 있었다. 이곳의 이야기를 들려줄 이들을 찾아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경로당 안은 조용한 소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생활 정보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담요 위에서는 화투패가 던져지는 소리와 짤랑이며 주인을 찾아가는 동전 소리가 빠글빠글하게 볶아낸 짧은 흰머리들이 맞대어진 경로당 안을 은근하게 배회했다. 낯선 이들의 방문에 조용한 소음에도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 얘기를 뭐 하러 들어?”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어르신들 인생 이야기 좀 해주세요.”
“여기, 여기, 이 할매들이 여기 오래 살았다. 이야기 한 번 해 보이소.”
그중에서도 좀 더 젊은 축에 속하는 듯한 할머니가 나란히 앉은 두 분의 할머니를 지목했다.
이 동네의 터줏대감으로 지목된 할머니들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좀처럼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쇠락한 동네의 낡은 이야기는 그들에게 어쩐지 회상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남편 복, 자식 복 없이 지지리 고생만 해서 할 말도 없어. 근데 이 할매는 달라. 복이 많아. 복이 많아서 그런지 맨날 웃고 다녀.”
“나는 웃기는 잘 웃어요.”
복이 남다르다는 할머니의 말간 얼굴이 이쪽으로 다 건너오기도 전에 옆의 할머니가 또다시 말을 보탰다.
“이 할매는 별명이 복노인이야. 이 할매 뒷집에 살았기 때문에 내가 잘 알아. 자식들도 다 잘 됐고 돈도 많아. 며느리들 셋을 불러다 앉혀 놓고 천만 원씩 쥐여줬다니까!”
“맞아. 내가 갖고 있으면 뭐 해. 자식 주면 더 좋지. 나도 좋고 자식들도 좋고.”
복노인 할머니의 나지막한 대답에 뒤쪽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 사이에서 타박이 쏟아졌다. 경로당에 와서 저런 자랑을 하면 어쩌자는 거냐는 뾰족한 말들에도 복노인 할머니는 찔림 없이 잔잔한 웃음만 내보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상대방의 말뿐 아니라 어조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로서는 면전에서 날아오는 가시를 막아내는 방패도, 의연한 미소로 대처하는 가면도 없다. 복노인 할머니는 당신 쪽으로 날아온 뾰족한 가시를 유연하게 구부리는 것이 어째서 가능한 것일까?
처음 이 일을 제안받았을 때, 나는 내 존재를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라는 신분도, 적은 보수도 승은을 입은 것 같은 마음 앞에서는 문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청정무구의 웃는 낯으로 도시재생센터의 문을 열어젖히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상견례도 없이 시작된 일은 자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네를 탐색하며 인터뷰이를 물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스산한 골목을 걷고 걸으면서 허탕을 치는 날도 수두룩했다. 가만히 앉은 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날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사람을 겨우 찾았을 때도 인터뷰와 녹음, 사진 허락을 구하는 서로의 합이 맞지 않아 무참하게 어그러지기도 했다. 한 명의 인터뷰이를 위해 몇 날 며칠의 시간을 쏟아야 하기도 했다. 거만한 인터뷰이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져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은 점차 가면을 갈아 끼울 새도 없이 일그러졌다.
그곳의 시간은 이토록 이상하게 흘렀다.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의 시집살이처럼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지 못해 얼굴만 불콰해졌다. 그리하여 가시 돋친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출되면 머릿속 센서에 불이 들어왔다. 정수리가 뜨끈해지고 심장이 빨라지는 것으로. 내 혀뿌리에서 올라오는 뾰족한 말을 감지하면 바로 실없는 농담이 작동되었다. 함께 일하는 열다섯 살 어린 젊은 청년에게 ‘선배’라 부르며 내 환갑 잔치에 초대하겠다는 둥, 선배의 결혼식 때 한복을 입고 참석하겠다는 둥 주책없는 말들을 뱉어냈다. 면전으로 날아오는 가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만큼 내 쪽에서 날리는 가시도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은 자주 홧홧했다. 불콰해진 얼굴이 들킬까 봐 광대 노릇을 하다 광대가 얼얼해졌다.
경로당의 서늘한 분위기에도 복노인 할머니의 복 많은 인생은 옆의 할머니에 의해 계속해서 회자되었다. 술 취한 남편의 폭력을 피해 자식들을 안고 업고 골목을 달릴 때 앞집 복노인의 마당에서는 늘상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하하 호호 웃음소리를 들으며 도망친 후에 남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고. 복노인 할머니의 살아생전 다정했던 영감, 제 몫을 해내며 살아가는 살가운 자식들, 재개발 구역에 들어 보상받은 옛집까지. 뒷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복노인 할머니의 잔잔한 얼굴은 굴곡 없는 삶에서 나오는 듯했다. 두 할머니의 대조되는 삶의 여정은 얼굴에서 극명하게 표현됐다. 손을 맞잡고 카메라를 향해 선명하게 웃음 짓는 복노인 할머니와 달리 뒷집 할머니는 몇십 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웃지 못했다. 돌사진을 찍는 아이 대하듯 앞에서 딸랑이를 흔들고 ‘까꿍’을 해도 끝내 눈물짓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맞잡아오는 복노인 할머니의 손마저 버거운 듯 보였다.
인터뷰가 끝난 시각은 느지막한 오후였다. 경로당 안에서 서로의 시간을 용해하던 할머니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 우리는 복노인 할머니의 속내도 더 듣고 이야기 속에 나온 할머니 댁의 사진도 찍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린 채 할머니를 댁까지 모셔다드렸다. 복노인 할머니의 집은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 잡은 한국식 주택이었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시멘트 담벼락의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멘트를 바른 마당이 먼저 보였다. 마당 한구석에는 분명 재래식 화장실이었을 작은 건물이, 다른 한편에는 아들이 만들어줬다는 시멘트 벽돌로 낮은 담을 쌓은 조그만 텃밭이 놓여 있었다. 그 집에서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복을 타고났다는 경로당 할머니들의 평과 조금 달랐다.
열아홉 살에 시집을 온 할머니는 셋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남편은 성실했지만 가난했다. 셋방살이 7년 동안 6남매를 낳았다. 입덧이 심해서 밥도 못 먹을 때 새빨간 홍옥이 잘 먹혔다. 없는 살림에 주인집 눈치가 보여 먹고 난 사과 심지는 아궁이에 넣고 태웠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뛰어놀다가 집에 들어와 다 같이 양푼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 6남매는 자라났다. 그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세월이 까마득하게 지났다. 할머니 대신 빨래를 옥상에 널어주던, 인심 좋다고 동네에 소문난 큰아들은 그의 나이 스물아홉에 사고로 죽었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시간은 멈춤 없이 흘렀다. 자식들이 각자의 둥지를 지어 떠나고, 성실하던 영감은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8명이 양푼에 밥을 비벼 먹던 둥지에 이제 할머니 혼자 남았다.
복노인. 아들의 죽음을 겪은 이에게 붙은 이 무자비한 별명은 어쩌면 할머니를 지킨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웃기는 잘 웃어.”라는 말은 고단한 세월을 통과하는 할머니만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경로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도 없으면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복노인 할머니의 방 안에는 경로당에서 색색의 스티로폼 알갱이를 붙여 만든 가면이 놓여 있었다. 노란 볼에 분홍의 이마, 그 위에 빨간 연지곤지를 찍고 새색시처럼 웃는 가면. 다른 할머니들의 타박에도, 무자비한 삶 앞에도 반드시 웃겠다는, 일그러지지 않는 할머니의 ‘웃는 낯’ 같았다.
간택당한 기쁨에 쓸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이 일에 쏟았다.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었다. 아이들의 하교 시간을 모른 척했다. 소분한 밥과 반찬에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내가 맡은 인터뷰이의 녹취를 새벽까지 듣고 읽고 썼다. 차곡차곡 빚을 변제하는 성실한 빚쟁이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아니까. 아니다. 사실은 알아주길 바랐다. 칭찬받고 싶어서 갖은 티를 냈다. 집을 벗어나 바깥으로 향한다는, 스스로 대견함 같은 것도 있었다. 속에서 인정 욕구를 수증기처럼 뿜어내는 동안 늘 과습 상태였던 집안 화분들의 흙은 바스러졌다.
나를 알아 달라고 광대를 끌어올리는 동안 나는 나를 얼마나 지켰을까? 복노인 할머니는 부모 복도, 남편 복도, 자식 복도 없다는 뒷집 할머니의 지난한 세월을 알은체하며 보듬었을 것이다. 자식을 잃었을 때도, 남편을 잃었을 때도. 세상이 요지경 같아도 곁을 보듬고 얽히며 자신도 지탱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타박을 웃는 낯으로 받아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구미에 15년을 살면서도 이 동네를 몰랐던 것처럼 사람도, 지역도, 세상도 내 쪽에서 먼저 알은체하지 않으면 그쪽에서도 나를 알 리 없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제대로 얽혀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시재생센터의 문을 열어젖혔다면, 광대가 얼얼해지는 순간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