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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2002

by 임유진


오월이었다. 오월의 유려한 햇살처럼 아이는 낮에도 밤에도 친구를 좇았다. 해가 지고 밤의 시간이 찾아와도 아이에게 드리워진 친구라는 햇살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아이의 귀가 시간이 야금야금 늦어지는 동안 나의 화도 시루떡같이 켜를 지었다. 유난히 청명했던 오월의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온 열다섯 아이 앞에 나는 갓 나온 뜨끈한 시루떡처럼 섰다. 아이는 친구랑 같이 아파트 안을 걸으며 이야기하다가 늦어졌다고 심상하게 대답하며 저도 이내 시루떡이 되었다.

그날의 ‘시루떡 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나였다. 가족들과 집에 있는 것보다 친구랑 있는 게 더 좋다는 아이의 말에 목에 떡이 걸린 듯했기 때문이다. 혼자 방으로 들어온 뒤에도 들썩이는 가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쩐지 배신감과 상실감이 몰려왔다. 친구가 더 좋다고? 너만 친구 있니? 나도 친구 있다! 전화번호부를 열어 대학교 친구 이름을 검색했다. 다정한 문자 한 통 없이 곧바로 전화를 걸기에 요일도 시간도 적당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이 때문에 벌겋게 상기되었던 목소리가 다른 색깔로 부풀었다. 그 친구를 통해 ‘엄마’가 아닌 ‘나’로 순식간에 전환되었다.


2002년, 스무 살, 대학교 1학년이라는 태로 친구들과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강의실에서, 학회실에서, 학교 잔디밭에서, 학생회관 식당에서, 학교 앞 술집에서 만났다. 학교 앞 화장품 가게에 단체로 들어가 민트색 메이크업 베이스와 이자녹스 파우더 13호를 똑같이 사서 다음 날 얼굴과 목에 확고한 경계선을 그은 얼굴로 만났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부족함에 다시 화장품 가게에 다 같이 가서 에뛰드 봉숭아꽃물 틴트를 샀다. 지금 아이가 제 친구들과 ‘올리브영’에 몰려가듯. 13호 아이보리 낯에 봉숭아꽃물을 들인 입술로 이자녹스 파우더와 에뛰드 틴트를 넣은 작은 핸드백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왼손에는 책이 든 플라스틱 파일을 들고 교양 수업 강의실을 찾아다니다가 두꺼비 분식에 가서 쪽닭에 소주를 마셨다. 버스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주욱.


아이가 하는 것처럼 방문을 꼭 닫고 핸드폰을 귀중히 받든 채 ‘그땐 그랬지’ 하면서 옛이야기에 한창 빠져들다 친구들을 소환하기로 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뭉치자! 대학교 동기들의 단체방에 친구가 운을 띄우면 내가 동조하며 판을 키우기로 했다. 2년 전 한 친구의 결혼식 때 만났었으니까 만날 때가 되었다. 건강검진도 2년에 한 번씩 하니까. 단체방에서 생존 신고조차 뜸한 친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했다. 김춘수의 <꽃>처럼 하나의 몸짓이 아닌 꽃으로의 친구들을. 그리고 친구들아,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나 또한 다만 하나의 몸짓에서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와 유리된 엄마 말고.


유월, 시내 중심에서 한 블록 비켜난 거리의 이자카야에서 이름을 불러 서로에게 꽃이 된 친구들과 만났다. 부러 중심에서 비켜났지만, 그곳에도 가족보다는 친구랑 노는 게 더 재미있는 나이의 사람들이 넘실댔다.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인지 모인 이들끼리 내밀하게 놀 수 있게 이자카야의 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날 호명에 응답한 친구들이 한 명씩 들어설 때마다 어쩐 일인지 똑같은 말을 했다. “여기 지금 나만 침침한 거 아니지?”


건강검진 문진표에 체크하듯 그동안의 근황을 간단히 체크했다. ‘반갑다 친구야’를 찍는 것처럼 집에 있는 가족들은 슬그머니 뒤로 미뤄두고 우리들의 이야기와 노래는 2002년과 2025년을 넘나들었다. ‘야다’의 <이미 슬픈 사랑>이 ‘데이식스’의 <예뻤어>로 넘어가고, 첫 연애 상대와의 일화가 현재 반려인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어머님’의 자애로운 눈가 주름과 ‘부장님’의 뭉근한 몸태 안에는 여전히 대학교 1학년, 그때의 자아가 들어 있었다. 초여름이었다. 날씨도, 우리들 안의 우리 자신도. 이자카야를 나선 저녁 7시에도 어스름이 조금도 내려앉지 않았을 만큼.


본태는 초여름일지라도 겉으로 보이는 몸태는 영락없는 사순, 가을이었다. 노래방에서 우리는 여느 회사의 회식 자리 같았다. 스스로 신세대인 줄 아는 ‘부장님’의 노래가 폭주하자 ‘만년 과장’의 혼신을 담은 목청이 폭발했고, 재계약이 얼마 남지 않은 비정규직 ‘인턴’의 탬버린이 쉴 새 없이 흔들렸으며, 저녁밥에서 놓여나 회식이 마냥 신이 난 ‘단기 주부 사원’의 트로트가 진득했다. 막차를 놓치고 다음 날 첫차를 기다리며 밤새워 놀았던 2002년과 달리 사순의 만남은 다음 날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오후 5시에 만나 4차까지 자리를 옮겼음에도 밤 10시 47분에 헤어져 모두 지하철을 타고 안전 귀가를 하였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 요즘 아이들이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찍는 ‘인생네컷’을 찍었다. 머리띠와 안경을 정성껏 골라 꼈지만 기계 조작이 미숙한 사순들은 일곱 명의 얼굴이 모두 들어가는 가로 프레임을 고르는 방법을 몰랐다. 땀이 흘러 척척한 몸을 밀착시켜 세로 프레임에 일곱 얼굴의 한 부위씩만 겨우 밀어 넣었다. 그날의 ‘인생네컷’처럼 인생의 사계절이 한 컷씩 저장될 때마다 친구는 내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일 것이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가 아닌 본태인 내 이름을. 아이가 집보다 제 친구들이 더 좋다고 하는 이유도 저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일 것이다. 본디의 저를 추동하게 하는.



초여름이었다. 날씨도, ‘엄마’라는 태 안의 나도.

친구들과 함께 마신 초여름의 맥주는 입안에서 토도독 톡톡 터지는 팝핑 사탕처럼 나를 추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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