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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표시

by 임유진

큰마음 먹고 면세점에서 산 화장품이 똑 떨어졌다. 비싼 값을 하는 것인지 화장품을 쓰는 두어 달 동안 평생을 말썽이던 턱 주변이 말끔해졌다. 피붓결도 어쩐지 전에 없이 깐 달걀 같았다. 그러나 면세점에서 살 때도 큰마음을 먹어야 했었기에 제값을 다 주고 다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사코 갈색의 빈 병에 자꾸만 눈이 갔다.

애꿎은 빈 병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 화장품의 전성분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정제수, 비파다발효용해물, 피이지-8, 프로판다이올, 트리펩타이드-32, 효모추출물, 소듐하이알루로네이트, 락토바실러스발효물, 토코페롤아세테이트, 부틸렌글라이콜, 스쿠알렌, 바오밥나무씨추출물, 캐모마일꽃추추물, 흰무늬엉겅퀴추출물, 만주자작나무껍질추출물, 산뽕나무뿌리추출물 등등. 한 번에 읽어내기도 어려운 성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단순히 좋다고만 생각했던 화장품의 속이 이다지 복잡하다. 이토록 유려한 성분들을 브랜드만의 독자적인 ‘크로노룩스 기술’로 섞어 피부에 수분을 충전하고, 모공을 관리하여 탄력을 강화하고, 주름을 개선하여 피부에 광채를 더해 항산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 갈색병 화장품의 정체이다.


화장품의 뒷면을 가득 채운 정보들이 그것의 전성분을 친절하게 알려주는데도 어쩐지 미궁에 빠진다. 알 듯 말 듯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다. 갈색병 화장품은 값비싼 발효추출물과 히알루론산이 주요 성분이지만, 화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탕은 정제수, 즉 물이다. 거기에 보존제인 페톡시에탄올, 색소인 황색4호 같은 유해 성분도 포함되어 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것은 흔하디흔한 물과 유해 성분이 필수 성분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이루고 있는 성분들은 무엇일까? 갈색병 화장품 성분란에 쓰여 있는 전성분처럼 나의 전성분을, 그 정확한 퍼센티지까지 수치화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화장품처럼 나를 이루고 있는 성분들을 수치화하여 나열하고 싶다. 어떤 성분이 어떻게 배합되어 있길래 이런 모양, 이런 성질인 것인지 분석하고 싶은 마음이 간곡하다. 내 몸이라는 병에 들어찬 어떤 성분들의 배합이 나를 이런 형질로 발현되게 한 것일까? 욕망 10%, 욕심 10%, 허영 10%, 나태 11%, 성실 9%, 고집 9%, 아집 11%, 불안 10%, 광기 9%, 허기 11%. 이 성분들이 자기애라는 정제수에 혼합되었다.


허영에 쌓인 욕망으로 어떤 것을 욕심내어 그것을 이루고자 성실하게 수행하다가 이내 나태에 젖어 그 어떤 것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에 떤다. 그럼에도 고집스레 욕심을 부리다 광기 어린 아집에 빠지지만 끝내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허기에 허덕인다. 글을 쓰고 싶다는 순정한 마음보다 그냥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글에 불순물처럼 섞여 밤낮으로 매달리는 척하다가 놓아버리고, 앞에 놓인 글을 보고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자기 본위에 빠진다. 곧바로 이어지는 불안과 허기. 여름날 설익은, 익기도 전에 상해버린 살구 같다.

욕심을 부리다 허기가 진 것이 나의 현재 꼴이지만, 욕심과 허영 같은 유해 성분이 나의 주성분일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욕망은 분명 인간의 필수 성분이다. 정지아의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자폐가족’이 아니고서야 보통의 인간이 ‘무망’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자발적 정체와 고장은 다르다. 다만 이 욕망에 붙어 있는 허영과 욕심의 수치를 덜어내는 기술이 보다 오롯한 인간을 만드는 핵심기술일 것이다. 허영과 욕심을 희미하게 녹일 나의 정제수는 무엇일까? 이야기다.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자. 가볍지만 저급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혹은 가벼운 이야기를 무겁게 쓰는 것이 나의 정제수라는 친구의 말을 믿으며 어두운 욕망의 낯빛을 광휘로 바꿀 독자적인 기술을, 나는 또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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