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문을 열자 진한 먹물 냄새가 물큰하다. 먹을 갈다 던져놓은 듯 생리혈이 눅진하게 묻은 속옷이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저절로 콧등이 찡그려진다. 눈을 반쯤 감고 샤워기의 물을 틀어놓은 채 곱은 손으로 아이의 속옷을 벅벅 문지른다. 기저귀를 갈다 노르스름한 변이 수채화 물감 짜듯 흘러나온 순간을 마주하고 코를 박고 기뻐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을 향해 황금변을 발사하던 그때 그 신생아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먹물 같은 피를 내보낸다.
아이는 열세 살이 되는 1월 1일에 생리를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식 날 첫 생리를 한 나와 비교해 1년 6개월이나 빨랐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생리를 시작한 아이를 마주하고 남편에게 케이크를 사 오라고 했다. ‘생리 축하’ 파티를 열고 아이에게 촛불을 불게 했다. 소식을 들은 동네 언니는 아이에게 용돈을 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왠지 뭉클한 마음을 안고 아이의 성장을 축하했다. 이제 겨우 열세 살, 초등 6학년이 될 아이의 몸은 벌써 다음 세대를 데려올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어쩐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몸이 성장하는 속도에 마음은 보조를 맞추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엄마’인 것이 여전히 어색하고 어려운데 아이는 계속해서 성장한다는 사실이 벅찼다. 너무 작아서 안아 들기조차 겁났던 아기가 아이로, 청소년으로, 어른으로 성장의 판을 넓혀가는 것이. 그리하여 종내에는 나처럼 ‘엄마’가 될 것이라는 첫 번째 징후가 확연히 나타난 것이. 몸의 속도를 마음은 따라가기에 버겁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내 딸이랑 친구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방인같이 이곳에 뚝 떨어진 나에게 친구가 되어주러 온, 우주의 별로 유영하다 나의 부름에 이 세계로 온 내 친구. 지금은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이기적인 인식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는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데. 다만 저의 생을 위해 태어난 것일 텐데. 나의 엄마는 내가 작디작은 내 친구를 안고 물고 빨고 있을 때 한 가지 사실을 선연하게 예언했다.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지. 너도 키워 봐라. 딱 너 같지.”
“나는 내 딸이랑 친구가 될 거야. 엄마처럼 안 해.”
“똑 너 닮은 딸일 거야.”
선언문 같은 엄마와 나의 말 중에 이제 와 실현된 것은 엄마 쪽이다. 품고 키워봐야 저 잘난 줄 알고 훨훨 날아가는 게 자식이더라는 엄마의 말은 악담이 아니었다. 엄마가 나를 통해 깎이며 깨달은 명징한 진리였다. 친구 같은 엄마가 되려면 생색 없이 의무와 책임을 뒷받침하면서 비밀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이제야 생각한다. 의무와 책임을 앞세우기 시작하면서 친구라는 이름의 몫은 날려버린, 그냥 엄마라는 것도.
‘생리인’ 3년 차인 딸과 나는 함께 자취하는 대학생들처럼 생리대를 공유한다. 다 썼으면 채워 놓으라는 말 대신 다 썼으면 미리 공지하라는 말로. 둘째를 낳은 후부터 십여 년간 또박또박 28일 주기를 지키며 일주일간 피의 전쟁을 치렀던 내 몸은 언제부턴가 생리 예정일을 훌쩍 지나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또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럴 리 없음에도 임신을 걱정했다. 마흔둘의 생리인은 열네 살의 생리인에게 사정을 알렸다. 그러자 열네 살 생리인은 여상하게 말했다.
“엄마, 폐경이야?”
몸의 속도를 마음은 언제쯤 따라갈 수 있을까? 이제 임신을 걱정할 몸이 아니라 폐경을 의심할 몸이라는 것을 마음은 한사코 거부한다. 고등학생 때 겨울을 앞두고 엄마를 졸라 시커먼 파카 대신 빨간 떡볶이 단추 코트를 샀었다. 엄마는 그 옷의 재질과 방한력을 못마땅해하며 반대했지만, 결국 그해 몹시도 유행했던 그 코트는 내 기호대로 산 최초의 옷으로 기억된다. 여전히 나는 떡볶이 단추 코트를 즐겨 입는다. 엄마도 여전히 나의 떡볶이 단추 코트들을 볼 때마다 타박한다. 나는 지지 않고 내가 좋다는데 엄마가 왜 그러냐는 면박을 돌려준다. 자기 친구를 엄마가 왜 왈가왈부하냐고 내게 정색하고 따지던 딸처럼. ‘똑 너 닮은 딸’의 현현이다. 몇 년 전, 카페에서 딸과 함께 아몬드라떼를 주문한 나에게 직원은 “어머니, 빨대 없이 드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교복 같은 떡볶이 단추 코트를 입고 있어도 어머니는 어머니. 외양은 거스를 수 없는 어머니임에도 그 속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덜 자란 소녀가 있다. 나는 아직도 철없는 딸과 철부지 엄마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엄마와 딸 이쪽저쪽 모두에게 반쪽짜리 어른인 셈이다. 이쪽에서도 울고 저쪽에서도 우는. 이쪽에 가서도 화내고 저쪽에 가서도 화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수영장에 갔다가 샤워실에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뜨거운 물이 튄 내 얼굴은 당시 드라마 “M”에서 M의 복수로 피부가 다 벗겨져 벌건 얼굴 근육이 드러난 박사님 같았다. 엄마는 화상연고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핏물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얼굴에 오이를 썰어 붙였다. 다음 날은 감자를 갈아서 붙였고, 또 다음 날에는 생알로에를 붙였다. 그러다 마침내 치약을 발랐다. 그러고는 따갑다고 우는 나를 다그쳤다. 나를 몰아세웠던 엄마는 그날 밤 화장대 앞 전화기를 붙들고 서서 울었다. “엄마, 어떡해. 유진이 얼굴이….”라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훌쩍였다. 똑 내 얼굴처럼 벌건 눈과 얼굴을 한 채로.
내게는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엄마가 우는 모습은 어쩐지 이상했다. 괜히 내 눈에서도 치약물이 흘렀다. 민트 맛이 나는 눈물이었다. 엄마도 어렸구나. 엄마도 어쩔 줄을 몰랐겠구나. 이제 와 생각한다. 반쪽짜리 어른은 언제 완전한 어른이 되는 걸까? 엄마한테 했던 말을 딸로부터 고스란히 돌려받았을 때? 내 딸이 딸을 낳았을 때? 저는 나처럼 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딸이 제 딸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볼 때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몸이 자라는 속도만큼 마음은 안 크는데 알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아침에 생리혈이 묻은 속옷을 화장실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면 다음 날 옷장 안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속옷의 깨끗한 귀환에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딸아이의 패딩을 사러 간다. 입으면 미쉐린 타이어 캐릭터로 변신하는, 나는 공짜로 줘도 안 입을 노스페이스 눕시를 사러 가기 위해 떡볶이 단추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