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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여 오라

제36회 신라문학대상 당선 후기

by 임유진

초겨울의 나른한 오후, 쇠락한 동네에 저 혼자 새것임을 티 내는 도시재생센터 사무실. 2층 사무실 안에서 바라본 창문 밖은 전깃줄로 메워진 무채색의 하늘이다. 바깥은 헌 것투성이인데 창문 안쪽은 새것의 냄새가 차지했다. 사무실 안을 메운 히터의 열기가 어쩐지 온기 없이 삭막하다. 금오시장 사람들의 인터뷰집에 들어갈 글을 검토하기 위해 도시재생센터 사무실에 기록화 사업팀이 모였다. 기록화 사업팀이 하는 일은 이곳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지역민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여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일에 참여하는 나의 위치는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다. 한 마디로 권한 없음. 기록화 사업은 낙후된 동네에 재생의 불씨를 피우기 위한 시도이지만, 과연 이곳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의구심이 든다. 의구심은 이 일에 전심을 다 한 것과는 별개로 들어찬다.

인터뷰이에 관해 각자가 써 온 글을 인쇄하여 나눈 뒤 소리 내 읽고 구성과 편집을 의논하기로 했다. 인터뷰이 한 명당 7,000자가 훌쩍 넘는 원고를 혼자 쉼 없이 읽고, 고쳐야 할 내용과 바꿔야 할 문장 배열을 받아 적다 보니 활자는 눈앞에서 날아가고 정신도 활자에 업혀 달아났다. 히터의 가짜 온기는 얼굴의 수분뿐 아니라 정신의 물기까지 앗아가는 듯하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이 생기를 띤 채 불끈거린다. 속한 자리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일 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환희의 틈입이다. 쉴 틈을 마련해주는 반가운 소리. 휴대폰을 안아 들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계단 틈으로 찬바람과 새것 냄새가 훅 끼쳤다.

“여보세요?”

“임유진 선생님, 신라문학대상 수필 부문에 <껍데기는 가라>로 당선되셨습니다.”

전화는 우편배달부의 따르릉 소리였다. 우편배달부의 자전거는 따르릉따르릉 소리를 내며 내게로 가로질러 와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를 전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들어간 사무실은 예의 삭막한 곳이 아니었다. 축하의 포옹으로 만든 다정한 온기와 환희의 열기로 무채색의 공간이 고결하게 빛났다. 비둘기가 물고 온 승리의 전언을 받아든 왕의 심정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신성해 보였다.


가족들에게 차례차례 연락을 했다. 공모전에 당선이 됐다고. 등단을 했다고.

‘공모전 당선됐어! 등단했어!’

학교를 마친 둘째 아이의 답장이 가장 빨랐다.

‘그래. 근데 나 오늘 미용실 안 가. 머리 자르기 싫어.’

머리카락이 눈두덩이 위로 올라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둘째 아이는 오늘 미용실에 가자고 했었던 말에 항거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아니아니, 미용실은 가야 해. 그리고 엄마 상 받았다니까. 작가 됐어!’

이어지는 아이의 답장은 허허로웠다.

‘그래. 축하해. 미용실은 안 감. 저녁은 떡볶이.’

아이는 이제 어미마저 싹둑 잘라먹고 만다. 갓난아기의 배꼽에서 똑 떨어진 탯줄처럼 잘려 나간 어미들은 꾸덕하다 이내 바싹 말랐다.


원고 검토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어김없이 예의 멀미를 선사했다. 덜커덩거리는 버스 안에서 믹스커피가 찰방이는 속은 제멋대로 울렁였다. 아마도 나는 이대로 30분 동안 멀미에 시달리다가 동네에 도착하면 떡볶이를 사 들고 집으로 걸어갈 것이다. 떡볶이와 오징어 튀김을 접시에 담아 둘째 아이에게 내어주고는 곧 학원에서 돌아올 첫째 아이의 저녁을 준비할 것이다. 준비된 저녁거리는 새우와 고등어. 첫째 아이는 새우를 고를 것이다. 냉동 새우를 흐르는 물에 씻어 꼬리를 깐 다음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새우와 버터를 넣고 휘리릭 볶아낼 것이다. 때마침 도착한 첫째 아이가 손을 씻을 동안 따끈한 쌀밥 위에 갈릭버터새우를 담아 식탁 위에 올려둘 것이다. 나는 각자의 메뉴를 각자의 방식대로 먹는 아이들 앞에 잠시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조금 나눌 것이다. 오늘은 수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지. 아이들은 내 이야기에 잠시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다가 이내 TV 화면에 관심을 더 보낼 것이다. 예상은 오차 없이 흘렀다. 방금 등단했지만, 일상은 어김없다. 조금 전 내 세상은 환연히 바뀌었는데 일상은 어째서 이토록 어제와 다름없는 것일까. 누군가 실험 카메라를 돌리며 내 반응을 염탐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는 기쁨은 금세 휘발된다. 사람들의 축하와 당선의 환희가 소실점으로 모이더니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구심이 똬리를 틀었다. ‘껍데기는 가라’로 당선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고등학생만 되어도 원제가 가진 제목과 내용의 무거움을 익히 아는데 얕디얕은 내 글이 당선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오롯이 드러내겠다는 글이지만 알맹이의 성긂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의심의 똬리는 당선의 환희를 점차 동여맸다. 조금 전 전화의 출처마저 의심스러웠다. 아니, 통화를 하긴 했었나? 전화벨은 도시재생센터 사무실을 도망치고 싶었던 자에게 들린 환청이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똬리를 트는 데는 으레 흘러가는 일상도 한몫했다. 아이들에 이어 퇴근한 남편의 저녁 밥상도 차려내야 했으니까.


파티는 없었다. 아이들과 남편이 연달아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숙제를 해야 했다. 생애 첫 당선 소감을 당장 다음 날까지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숙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파티는커녕 본인의 저녁 식사로는 간단한 계란간장밥을 주문한 남편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작은 방에 갇혀 세 시간을 내리 고민하며 당선 소감을 쓰고 나왔을 때 싱크대에 한가득 쌓인 설거짓거리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출근과 등교라는 내일의 일상에 복무하기 위해 이미 잠자리에 든 뒤였다. 모공마다 홍조가 그득한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당선 소감을 쓰느라 딱딱해진 어깨는 당면한 설거지를 해내느라 더욱 단단해졌다. 평소와 다른 오늘을, 보통과 다른 오늘을 추앙하려는 마음은 부려진 일상에 잠식당했다. 어쩐지 무의미 속에서 유의미를 찾느라 혼자 분망한 것 같았다.


평소와 같은 보통의 날들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등단으로 바뀐 것은 내 속의 세상뿐. 내 몸이 속한 세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굴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룽지를 끓여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를 보낸다. 아이들이 남긴 누룽지를 못마땅한 얼굴로 그러모아 버리고 방마다 창문을 연 뒤 이불을 정리한다.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작정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책상과 책장 같은 선반을 찾아다니며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훔친다. 너덜너덜해진 물티슈는 마지막으로 베란다 바닥을 닦는 데 쓰인 후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내키지 않는 몸과 마음을 얼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스피닝을 하러 아파트 지하의 피트니스 센터로 간다. 다리를 굴리고 허리를 접었다 펴느라 떡메에 맞은 찹쌀 반죽 같은 몸으로 집에 돌아온다. 몸의 허기에 마음이 바빠져 서둘러 씻고 점심밥을 차린다. 부엌과 식탁 사이 분망하게 떨어진 젖은 머리카락들을 테이프로 찍어내느라 점심밥은 한동안 저 혼자 식탁 위에 놓인 채 주인을 기다린다. 머리카락에 이어 부엌 바닥에 튄 기름기와 물기를 마저 닦는 사이 밥은 저 혼자 식탁 위에서 식어간다. 고작 머리카락 때문에 지체된 시간을 회복하고자 서둘러 밥을 먹고 서둘러 설거지를 하고 서둘러 수업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더욱 분주해진다. 고작 바닥에 튄 물기 때문에 하루의 사이클이 분망해진다. 두어 타임의 수업이 이루어졌던 주방은 다시 저녁 준비의 장이 된다. 집에 오는 순서대로 둘째 아이와 첫째 아이, 남편의 식사 준비 후에는 다시 설거지. 그리고 설거지를 하느라 흥건해진 싱크대와 바닥에 튄 물기를 닦는다. 반복은 점심밥과 저녁밥의 경계를, 하루의 시간을 모호하게 한다. 사소하지만 하기 싫고, 그럼에도 아니할 수 없는 작은 일들의 반복. 이것이 내 일상의 상수들. 일상은 무한 루프 안에 있다.


당선 전화를 받고 일주일 뒤, 시상식이 치러졌다. 시상식은 일상의 무한 루프 안에서 대단히 큰 변수였다. 머리카락이나 바닥에 튄 물기와는 다른 변수에 나는 도리없이 긴장했고 또 분망했다.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주로 가는 내내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단상 위에 오른다는 사실이 불러온 요의는 어떤 종류의 떨림일까. ‘이 상은 내게 유효한가?’ 확신은 얕았고, ‘수상 소감은 어떻게 말하지?’ 자신도 없었다. 차 안에 앉아 있는 몸이 붕 떠 차창 밖 너머 다른 곳으로 날려가는 것 같았다. 수상 소감을 웅얼거리는데 자꾸만 엉겨 붙는 혀에 한숨을 쉬자 남편이 말했다. “연습이 잘 안 돼?” 부러 입술을 오므렸는데도 티가 났나 보다. 속으로 연습 중인 것을 남편에게 들키자 붕 뜬 채 떨리던 몸이 의자 위로 착지하는 것 같았다.


시상식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나와는 무관한 것인 양 저 혼자 지나갔다. 처음 보는 이들의 축하와 격려에 감사를 답하면서도 내 눈과 입은 그들 너머로 날려가는 것 같았다. 차 안에서처럼 두 발이 이 세계에서 둥실 떠오른 것 같았다. 조그만 바람에도 나는 날려갈 것 같았다. 떠오르는 몸을 간신히 자리에 앉히고 팸플릿에 실린 내 글의 심사평을 살펴보며 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열여섯 줄의 심사평 정중앙에 현현하게 씌어있는 문장. ‘주제를 잡아서 일관성 있게 풀어나가는 면이 약했습니다.’ 들켰다. 두 발이 자꾸만 떠올랐던 이유는 껍데기를 버리고 껍질을 깐 알맹이가 실은 약해빠졌다는 것을 들킬까 봐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본선에 오른 모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일면 순일한 기대를 해보았지만, 들켜서 다행이었다. 이로써 내 알맹이로부터 나온 글이 약하다는 것을 공인받은 셈이다. 다시 알량한 껍데기로 비루한 알맹이를 무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변수로 채워진 하루 동안 나는 내내 요의를 느꼈다. 두려움과 떨림. 설렘과 떨림. 일상의 무한 루프는 나태 지옥에서 내내 돌기둥을 돌려야 하는 천벌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갸륵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매일의 일상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된다는 것은 지난한 하루치가 켜켜이 쌓인다는 것 아닐까. 일상을 영위하는 알맹이가 더디게 채워지는 것처럼 도시재생센터의 기록화 사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당장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해도 그곳에 조금씩 채도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 내 알맹이는 여전히 성글지만 일상이라는 껍질이 끌어당기는, 그 인력으로 이 세계에 안착했다. 일상의 껍질을 덮은 알맹이는 반짝이기도 한다.

알맹이여, 내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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