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그 차가 있었다 - 싱가포르
일상茶반사 #5
8월의 싱가포르는 한증막 그 자체다. 가뜩이나 뜨거운데 한낮이면 물동이채 들이붓는 듯한 스콜성 강우의 습도까지 곁들이면 고작 한 블록만 걸어도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시선은 자꾸 걸터앉을 곳만 찾게 된다. 2006년 8월의 싱가포르엔 그렇게 복날의 개처럼 헉헉대던 내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뻔한 직장인의 삶을 살다 별안간 유학을 결심하고선 번갯불에 콩 볶듯 시험 성적을 준비했다. 미국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GRE라는 시험을 봐야 하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PBT라는 형태의 종이 시험 방식만 가능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유학준비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컴퓨터 응시 방식의 CBT가 고득점에 더 유리해 보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시험을 봐야 했다. 한국의 유학준비생들은 대부분 가까운 일본에서 시험을 치르곤 했고 한 달에 한 번만 응시가 가능한 시험 성격상 월말월초를 껴서 두 번의 기회를 만드는 경우가 흔했다.
일단 6월 1일에 7, 8, 9월의 CBT 응시 신청이 시스템에서 열리자마자 불꽃 클릭으로 7월말 8월초 일본에서의 시험일정을 신청해두었다. 하지만 팀의 막내였던 나에게 여름휴가의 황금시즌인 7월말 8월초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팀원들의 휴가계획표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땐 이미 7월말 8월초에는 선배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시스템에 다시 접속했지만 8월말 9월초 일본 일정마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 아, 고득점은커녕 시험 응시조차 호락호락하지 않다며 망연자실해 하던 나에게 함께 GRE 공부를 하던 스터디 멤버가 조심스레 싱가포르를 추천했다. 일전에 업무차 싱가포르에서 1년 가까이 살아 익숙하고 아직 현지에 남아있는 지인도 있다고 했다. 일본보다 비행기를 길게 타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지인의 집에 머물며 숙박비를 절약한다면 전체 예산이 일본 일정 예산과 비교했을 때 크게 초과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12월까지 대학원 지원을 하려면 시험 일정을 더 늦출 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홀린 듯이 싱가포르로 떠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해 함께 시험을 치른 우리 스터디원들 모두 운이 좋게 8월 말 첫 시험에서 원하던 점수를 얻어 9월 초 시험은 취소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싱가포르 관광에 나섰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8월의 싱가포르는 덥다. 게다가 회사 다니랴 GRE 시험 준비하랴 간신히 생존상태만 유지하던 내 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걷지 않고 가만히 트레일에 앉아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나이트 사파리의 호사를 끝으로 싱가포르에서의 우리의 일정은 관광이라기보다는 본격 한증막 체험으로 시작되었다.
서울로 치면 명동과 같은 싱가포르의 번화가는 오차드 로드이다. 싱가포르는 과거 영국령이었던지라 오차드 로드 한복판에 있는 다카시마야 백화점에는 다양한 홍차 브랜드들이 입점해있었다. 백화점 지하 매장에는 포트넘 앤 메이슨, 포숑, 해로즈 등 내로라하는 영국 홍차들이 나를 유혹했다 (지금 싱가포르 브랜드로 유명한 TWG는 한참 후에 시작되었다). 홀린 듯 이것저것 담아 빛이 속도로 결제를 하고 나니 마음만은 홍차재벌이었다.
하지만 건물을 나서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고온다습한 공기 속에서 홍차 10kg은 순식간에 짐이 되었다. 고작 몇 분 이동하는데 벌써 땀으로 눈이 따끔거렸다. 이미 땀으로 눅눅해진 손수건을 움켜쥐고 큰 서점이 있다는 근처 건물로 이동했다.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에서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흘려버린 땀만큼의 수분을 보충하고자 서점 내 커피숍으로 향했다. 싱가포르답게 커피 메뉴 외에도 다양한 티 메뉴가 있었고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메뉴는 시원한 얼그레이 티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스쿱채 담아주는 얼그레이 바닐라였다. 단 한 모금만으로도 얼그레이 바닐라는 그저 완벽 그 자체였다. 오랜 시험 준비로 인한 고단함과 오늘의 더위를 싹 잊도록 쉼과 회복을 건네주는 바닐라의 달콤함, 막상 시험을 마치고 마주한 조금은 허탈하게 생채기난 성취감을 위로해주는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 아닌 다채롭게 펼쳐질 미래를 향한 설레는 기대감을 선사해주는 베르가못의 향긋함까지. 그렇게 8월의 싱가포르는 내게 시원하고 달콤한 위안으로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