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茶반사 #4
사무실 나의 공간에는 동료들이 “중아 다방”이라고 부르는 작은 선반이 있다. 처음에는 책상 위에 몇몇 틴과 티백박스들을 놓아두기 시작했는데 점점 홍차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금세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해져버렸다. 옆으로는 더 늘릴 공간이 없어 별수 없이 위로 쌓기 위해 작은 선반을 하나 구입했고, 보통 양념통으로 쓰이는 작은 유리병에 홍차들을 소분해 넣었더니 미관상 꽤 그럴싸한 홍차장이 되었다. 지나가던 동료들도 조금씩 관심을 보이며 가끔 티타임을 요청하면서 그렇게 “중아 다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월요일 아침의 출근길은 버겁고 뻐근하다. 늘 10분쯤 덜 잔 느낌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오롯이 출근을 해야한다는 책임감 하나로 꾸역꾸역 왼발 오른발을 내딛게 된다. 이런 고된 출근길 몽롱한 머리 속 안개를 조금 걷어주는 데 일조하는 단 하나의 행복한 고민이라면 “오늘은 무슨 차를 마실까?” 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어떤 향으로 하루를 시작해볼까, 라는 질문은 모든 직장인의 최대 고민거리인 오늘 점심은 뭐 먹지, 라는 질문보다 훨씬 행복하다. 배고픔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점심 메뉴 고민이 아닌, 나만을 위한 작은 사치(indulgence)를 누리기 위한 차 메뉴 고민은 하루를 훨씬 풍족하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당연하게도 차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바로 날씨이다. 차는 대개 그 성질에 따라 몸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따뜻하게 해주기도 한다. 홍차를 비롯해 보이차, 생강차, 계피차, 감잎차, 차이티 등은 손발이 찬 내 몸에 보일러를 켠 듯 온기를 돌게 해주는 따뜻한 성질의 차들이다. 물론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성질의 차들도 많다. 녹차, 우엉차, 둥글레차, 옥수수수염차, 국화차, 결명자차, 보리차 등이 찬 성질을 가졌다고 하는데 나처럼 전형적인 소음인 체질은 많이 마시게 되면 배앓이를 하기도 하지만 더운 여름 아이스티로 즐기면 곱절은 시원하게 열기를 식힐 수 있다.
“오늘은 무슨 차를 마실까?” 하는 질문은 기본적으로 “홍차 vs 다른 차” 라는 선택으로 출발한다. 다른 차라고 하면 홍차가 아닌 세상의 모든 차들, 즉 녹차, 전통차, 과일청 등을 모두 포함한다. 간혹 아침 식사를 건너뛰고 출근한 날이면 든든하게 미숫가루나 오곡라떼를 찾게 되기도 한다. 탕비실 냉장고 한 켠 작은 트레이에는 레몬청, 유자청, 자몽청, 모과청, 생강청, 도라지청 등이 담긴 유리병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내 이름을 붙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만약 “홍차 vs 다른 차”에서 홍차를 선택했다 하더라고 선택은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가향차 vs 비가향차, 핫티 vs 아이스티, 스트레이트 vs 밀크티, 영국식 밀크티 vs 일본식 로열 밀크티 등등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카페인에 약해 머그컵 기준으로 하루 두 잔으로 스스로 음용 제한을 걸어둔 나로서는 하나하나의 선택에 매우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깔끔하고 세련된 맛의 클래식 비가향차를 마실지 풍부한 향과 맛의 가향차를 마실지, 그 중에서도 어떤 블렌딩의 무슨 티를 마실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핫티 vs 아이스티의 대결이다. 쌀쌀한 아침 바람에 핫티로 결정을 했다면 그냥 끓인 물에 우려 마실 것인지 (스트레이트 티) 아니면 우유를 넣어 밀크티로 마실 것인지도 큰 갈림길이다. 밀크티라고 다 같은 밀크티가 아니다. 크게는 진하게 우린 홍차에 실온의 우유를 넣은 영국식 밀크티 vs 냄비(밀크팬)에 홍차를 우리고 우유도 함께 끓여 더 진하게 우려내는 일본식 로열 밀크티 중에 선택해야 한다. 여기에 더 깊이 파헤쳐보자면 한국의 탕수육 부먹 vs 찍먹 만큼이나 케케묵은 논란이 되어온 영국의 MIF(Milk in first, 우유에 홍차 붓기) vs TIF (Tea in first, 홍차에 우유 붓기) 선택도 못지 않게 치열하다. 아이스티 역시 쉽지는 않다.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린 후에 얼음에 부어마시는 급랭이 대표적이지만 몇몇 홍차의 경우 탄산수나 사이다, 우유 등에 찻잎이나 티백을 담궈 저온에서 오랜 시간 우리는 냉침법으로도 즐기는 등의 여러 갈림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핫티든 아이스티든 다 우려내고 나서도 여기에 레몬을 올릴지, 설탕을 넣을지, 간혹 위스키를 넣을까 하는 고민이 추가되기도 한다.
내가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물끄러미 홍차장만 쳐다보고 있다면 부디 말을 걸지 말아주시길... 겉보기엔 멍하게 보여도 “오늘은 무슨 차를 마실까?”를 고민하며 얼마나 치열하게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지, 이제는 조금 가늠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