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그 차가 있었다 - 프랑크프루트

일상茶반사 #3

by 임중아

2007년 4월 10일 오전 11:35. 나는 드디어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삼년 반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대학원으로 진학하기 전, 오랜 바람이었던 유럽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간절했던 마음과 달리 현실은 지독하게 퍽퍽했다. 내가 올린 기안서에 빨간 줄이나 그을 줄 알았지 자기 손으로는 보고서 한 줄 쓰지 않던 손위과장에게 내가 담당하던 업무를 넘겨주느라 퇴사 전날까지도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하나하나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유럽도 사람 사는 곳인데 가서 사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가방에 쑤셔넣고 나는 40일 일정에 백팩 하나 둘러메고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앞뒤 상황이 이러하니 여행계획 따위 세웠을 리 만무했다. 비행기표와 유레일 티켓만 덜렁 사두고 유럽여행 완전정복 같은 책 한 권 손에 쥐고 겁도 없이 떠났던 것이다. 그렇게 무턱대고 떠난 여행에 단 하나 목표가 있었다면 당시에는 한국에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았던 독일 브랜드 로네펠트 티를 최대한 많이 사오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프랑크프루트 아웃 티켓을 사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첫 도시인 런던에서부터 물욕이 넘쳐났다. 남은 일정을 거듭 상기하면서 지름신을 꾹꾹 눌러가며 고심 끝에 가장 유명한 아이들로만 선별했지만 이미 가방이 꽉 찼다. 포트넘 앤 메이슨 백화점에서 퀸앤과 로열 블렌드를, 해로즈 백화점에서는 No. 14과 No 49을 구입했다. 위타드는 하필 세일까지 하는 바람에 때깔고운 티포원들에 잠시 홀릴 뻔 했지만 남은 40일 내내 깨트리지 않고 이고지고 다닐 자신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로네펠트도 좋지만 명실공히 홍차의 나라인 영국을 마지막 행선지로 했어야 하나 잠시 후회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행 중 베를린에서 갑작스런 비를 만나면서 오들오들 떨다 도톰한 외투를 하나 사게 되었고, 가져온 짐들과 영국에서 (나름 자제하면서 구입한) 홍차로 배낭은 이미 포화상태라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아 결국 기내용 캐리어를 구입하게 되었다. 물론 그 덕분에 소소한 기념품들을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사게 됐지만 마지막 프랑크프루트에서의 홍차 쇼핑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사다난했던 여행이 마무리가 되어가면서 마지막 행선지인 프랑크프루트에 도착했다. 2007년 당시에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유스호스텔에서 동전을 넣어가며 간신히 이용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아침, 숙소에서 로네펠트 홈페이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영어 페이지가 보이지 않아 독일어 페이지에서 프랑크프루트가 적혀있는 주소를 받아적었고 해당 주소로 가는 대중교통편까지 꼼꼼하게 검색해 적어들고 야심차게 숙소를 나섰다. 유반(U-bahn) 역에서 내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주소지를 찾을 수 있었는데 한국의 단독주택처럼 생긴 2층집이었다. 로네펠트 명패를 발견하고 들어가려 했는데 문이 잠겨있어 벨을 눌렀고 영어로 더듬더듬 로네펠트를 찾아왔다고 했다. 인터폰 너머의 당황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40일의 여정 내내 이상한 일들 투성이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있던 (아까 당황했던) 여자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무슨 일로 왔냐고 묻길래 로네펠트 티를 사러 왔다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도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껌뻑이며 실내를 슬쩍 둘러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홍차는 보이지 않았다. 영어가 익숙치 않았던지 리셉셔니스트는 고심 끝에 내선번호를 누르는 듯 하더니 누군가를 호출했다.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민머리가 어색하지 않게 큰 풍채를 가진 인상좋은 양복쟁이 아저씨가 나타나 무슨 일로 찾아왔냐며 영어로 내게 물었다. 반가운 영어에 나는 한국에서 온 여행객인데 로네펠트 티를 사러 왔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흐뭇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곳은 로네펠트 티룸이 아니라 사무실이라고 알려줬다. 그렇다. 나는 로네펠트 본사 오피스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로네펠트는 로네펠트인데 로네펠트 티는 팔지 않는 곳.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얼굴이 새빨개진 나에게 아저씨는 어떻게 로네펠트를 알게 됐냐고 물었고 나는 한국의 온라인 홍차 커뮤니티에서 로네펠트를 접한 적이 있고 독일에 여행온 김에 꼭 사고 싶었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들이 정식 진출하지도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찾아온 검은 머리 외국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아저씨는 잠시만 기다려보라더니 사무실로 들어가 티백상자를 하나 들고 나와 내게 건넸다. 자기네 브랜드를 좋아해줘서 고맙다며 이게 최근에 출시한 모겐타우(Morgentau /Morning dew)라는 차인데 이곳까지 찾아와준 기념으로 선물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선 역으로 돌아가 두 정거장만 가면 로네펠트 티를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며 정확한 위치와 찾아가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은 부끄러움과 큰 따듯함을 안고서 로네펠트 사무실을 나섰다. 아저씨 덕에 제대로 찾아간 로네펠트 티룸에서 평소 고대하던 아이리쉬 몰트, 레몬 스카이, 윈터 드림, 그리고 추천받은 디카페인 과일차까지 몽땅 사서 캐리어와 배낭까지 꽉꽉 채운 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 차들은 다시 나와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 (차 무게만 무려 10kg이었다). 최고의 밀크티를 맛보게 해주는 아이리쉬 몰트, 아침을 상콤하게 열어주는 레몬스카이,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찾게 되는 윈터드림, 카페인에 민감한 내가 늦은 저녁에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과일차까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티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내게 로네펠트에서 가장 애정하는 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모겐타우라고 대답할 것이다. 느닷없이 쳐들어온 외국인에게 따듯한 환대를 베풀어 준 로네펠트 아저씨의 친절의 맛이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 이후 나는 미국으로 떠나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로네펠트는 한국 시장에 진출했고 (가격은 사악하지만) 이제는 예전보다 쉽게 로네펠트 티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문득 본사 사무실에 차 한 잔 달라며 들이닥친 한 검은 머리 한국인이 남긴 강렬한 인상 덕분에 한국 시장에 진출한 건 아닐까라고 소심하게 주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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