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나면 대개 그럼 커피는 마시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 작은 목소리로 커피는 못 마셔요,라고 대답하고 나면 조금은 신기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진다. 비슷비슷한 질문들이 많아 FAQ로 정리해보았다.
Q: 커피를 안 마시는 거에요, 못 마시는 거에요?
A: 한 해에 10센티미터씩 크느라 늘 졸렸던 고등학생 때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싸구려 캔커피를 들이마시다가 위에 구멍이 나서 의사 선생님에게 커피금지령을 처방받았어요. 그 덕에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커피를 일절 마시지 않다가 스무 살이 되어 어른답게 커피를 마셔보겠다며 아메리카노에 도전했었죠. 그런데 그 날 정말 온 몸의 맥박이 여기저기서 활어처럼 펄떡거리며 머릿 속은 새하얀 채 좀비처럼 밤을 꼴딱 새고나서야 커피 카페인이 저랑 안 맞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Q: 커피를 안 마시면 아침에 잠은 어떻게 깨요? 집중해서 일해야 할 때는? (커피 없이 논문은 어떻게 쓴 거에요?)
A: 홍차에도 커피처럼 카페인 성분은 들어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아침에는 카페인이 든 차로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다행히 홍차 카페인은 커피 카페인만큼 저를 미쳐날뛰게(hyper) 만들지는 않거든요. 그렇지만 여전히 카페인에 예민한 편이라 오후 5시 이후에는 되도록 디카페인 티나 허브티를 마시려고 해요.
Q: 커피 참 맛있는데 그 맛있는 걸 못 마셔서 어떡해요?
A: 커피 맛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 중에 재(Ash) 맛이라는 표현을 봤어요. 제 입에는 커피는 딱 그 맛이거든요. 그리고 차의 종류가 커피 종류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기 때문에 딱히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Q: 커피숍에 가면 주로 무얼 마셔요?
A: 보통 커피전문점이라고 해도 대부분 커피 외에 홍차, 과일에이드, 핫초코 같은 논커피 메뉴가 곁다리로 조금씩은 있기 때문에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모임 장소를 옮겨달라거나 하는 까탈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Q: 커피 못 마셔서 힘들었던 적 있었어요?
A: 시애틀 살 때였던 것 같아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영화에 보면 시애틀은 365일 중에 300일은 비가 오는 동네라고 하죠. 날이 흐리고 부슬부슬 비가 자주 오다보니 사람들이 기운을 내려고 그러는 건지 커피를 정말 많이 마셔요. 스타벅스도 시애틀에서 시작된 브랜드잖아요. 시애틀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시애틀 앞바다는 소금 농도보다 카페인 농도가 더 진할 거라고도 하더라구요. 아무튼 그렇게 커피가 주류인 동네에서 비커피인으로서 비주류의 삶은 괜히 주류의 눈치를 보게 되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수반되더라구요.
Q: 그럼 20대 이후에는 커피는 한 방울도 안 마신 거에요?
A: 아주 가끔 커피의 효과가 필요할 때 이용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일전에 여름방학을 한국에서 지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미국내 연결편 비행기 좌석이 죄다 매진이라 못 샀던 적이 있거든요. 결국 한국-미국 직항편으로 대도시에 도착해 공항에서 차를 렌트하고 5시간 반 운전해서 제가 살던 도시까지 이동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했어요! 카페인 덕에 일 초도 졸지 않고 무사히 집까지 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도착하고 나서도 몸이 계속 깨어있어서 멜라토닌(졸음을 유도하는 자연성분) 알약을 먹고서야 잠이 들긴 했지만요.
Q: 가끔 커피 너무 많이 마셨다 싶은 날 차를 주문하기도 하는데 되게 맛이 없던데 차가 정말 맛있어요?
A: 사실 홍차전문점이 아닌 일반 커피숍에서 제대로 차를 우려내기가 쉽지 않을 거에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기본이 되는333을 지키기가 어려워요. 차를 주문하면 뜨거운 물에 티백을 넣어 주는데 진동벨이 울린 뒤에 찻잔을 받아든 나는 그 티백을 넣은 지 몇 분이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차마다 우러난 수색이 다른데 어떤 때는 다 우러나기도 전에 수색이 너무 짙어서 빼버리면 얕은 맛밖에 느껴지지 않고 어떤 때엔 너무 오래 담궈두어서 탕약 같은 맛이 나기 십상이죠. 둘째, 차를 맛있게 마시려면 차가 우러나는 시점부터 다 마시는 시점까지 온도가 일정해야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커피 전문점에서 찻잔을 먼저 데우고 다시 물을 받아 티백을 넣어주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요. 처음부터 뜨거운 물 붓고 티백 넣어 주는데 데우지 않은 잔에 마시면 찻잔 내의 물의 온도가 급변해서 차가 맛있게 우러나기가 힘들거든요. 미국에서는 종이컵 두개를 겹쳐서 더블컵에 우려주는 점원도 있긴 했지만 한국에선 거의 본 적이 없네요. 말이 나온 김에 아쉬운 점을 하나 덧붙이자면 차를 주문했는데 티백을 건져낼 작은 컵을 함께 주는 경우도 자주 보지못해 아쉬워요.
Q: 홍차 한 잔 마시기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A: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겠지만, 홍차는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들일수록 느낄 수 있는 만족도의 편차가 커지는 것 같아요. 오래 보아야 예쁘다 라는 표현, 홍차에 딱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내가 받아본 모든 질문을 다 담은 것은 아니지만 평소 듣던 질문에 자주 하던 대답들을 떠올리며 정리해보았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주류가 된 세상에서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비주류로 살아가는 사소한 불편함을 괜스레 엄살떨며 과장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삶의 작은 부분에서나마 비주류로 살아본 조금은 불편한 이 경험이 다양한 다른 영역에서의 비주류들을 이해하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된 것도 같아 전부 손해인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