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좋아해요

일상茶반사 #1

by 임중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소개를 하다보면 으레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 참 흔하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내 경우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덥석 취미라고 내세울 만큼의 꾸준함과 우수함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이라고 답하기엔 한 종목을 끈기있게 해 본 기억이 없다. 수영은 한팔접영과 웨이브킥이 따로따로는 가능하지만 합체가 되면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테니스도 레슨받을 땐 포핸드, 백핸드, 발리 각각 칭찬은 듣지만 발이 느린 탓에 어디 가서 한 게임 하실까요? 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취미가 요리라고 대답하기에도 내 실력이 애매하다. 오랜 자취생활로 이런저런 요리들을 할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밥상 차리기 수준이며, 스스로 새로운 메뉴를 고민하고 개발한다기보다는 그저 먹고 싶은 메뉴의 레시피를 검색해서 간신히 재현해보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사진동호회에서 사람들과 출사를 나가기도 했지만 핸드폰 카메라로도 충분해진 세상에서 먼지 앉은 필름카메라를 쳐박아 두고서 사진을 나의 취미라고 팔기에도 좀 겸연쩍다.


이런 나도 가끔은 용기를 내어 “저는 홍차 좋아해요.”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홍차가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냐고 피식하며 비웃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적어도 두 잔 정도는 매일 마시고 있고 여행을 가면 그 지역 특산차가 있는지 먼저 검색해보고 종종 티타임을 위한 베이킹도 도전해보고 있으며 물량, 찻잎의 양, 우리는 시간과 온도 등등 어떻게 마시는 것이 가장 내 입맛에 잘 맞을지 고민하고 도전하고 있기에 내 기준으로는 개중 가장 꾸준함과 우수함을 갖추고 있는 분야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홍차를 좋아한다는 나의 수줍은 고백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은 매일 커피만 마셔 홍차는 잘 모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몇몇은 되게 고상한 취미를 가진 양 대해주기도 한다. 물론 나는 소심하게 홍차가 꼭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항변해본다. 간혹 몇몇은 맛있는 차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보통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향이라는 것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기 때문에 차를 추천하는 것은 향수를 추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왜 홍차를 좋아하는 것일까에 대해 곰곰 생각해본 적이 있다. 가장 단순하고도 명쾌한 대답은 맛있으니까! 색다른 향으로 내 코를 즐겁게 해 주고, 한 모금만으로도 풍부한 맛을 전해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침대늘보라고 불릴 정도의 인간계 최고 귀차니스트인 내가 굳이 설거지거리를 감수하고 찻주전자와 찻잔을 준비하고 물을 끓여 다구를 미리 데우기도 하는 등의 아주 쓸데없이 부지런해지는 것까지를 설명하기엔 부족한 듯하다.


맛과 향 외에도 홍차의 또다른 매력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다양성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차의 종류가 와인의 종류만큼이나 많다고 한다. 차의 산지별로 다양한 환경에서 자라나며 (와인으로 비유하자면 떼루아) 찻잎을 덖는 방법이나 다른 재료를 섞는 방법에 따라 (커피로 치면 블렌딩) 각 경우의 수를 곱해보면 수천가지 조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세상의 차를 하루에 한잔씩 마신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다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차를 좋아하는 조금은 감성적이며 상징적인 진짜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차는 보통 3·3·3을 기본으로 하는데 바로 300cc의 물에 3g의 찻잎을3분 우리는 것이다 (차의 종류, 가공방식, 물의 종류 등에 따라 조금씩 더하거나 덜긴 하지만 모든 시작점은 3이다). 한 숟가락 남짓하는 3g의 찻잎만으로 제 몸의 100배에 달하는 맹물을 우아한 맛을 지닌 차로 바꾸는 마력, 나아가 찻잎이 우러나는 3분 동안 찻잔이 놓여있는 공간까지 향으로 가득 채워주는 마력 때문이다. 나라는 한 사람이 내가 있는 이 공간을 나만의 매력적인 맛과 향으로 채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소한 희망이 홍차의 마력과 닮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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