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신 기념 가족여행으로 조금 급하게 숙소를 찾다 보니 소노문 델피노에 자리가 있어 예약은 해두었는데 주중 내내 내리는 장맛비에 조금 심난했었다. 그런데 금요일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말갛게 얼굴을 드러낸다. 고속도로에서 사고 때문에 정체가 되긴 했지만 먼저 출발한 남동생이 26번 번호표를 받았다고 해서 느긋하게 이동한다. 11시 10분쯤에 도착해 방배정을 기다리며 미리 등산복으로 환복한다. 12시가 다가오자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사람들이 스멀스멀 모여들어 한산했던 로비가 가득 찬다. 한국인의 속도대로 빠르게 15분 만에 26번 순서가 돌아오고 우리는 다행히 울산바위가 보이는 마운틴뷰 방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다.
방배정은 12시지만 체크인은 오후 3시인지라 일단 청소가 되지 않은 방에 짐만 넣어두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속초항으로 이동한다. 청초호가 멋지게 보이는 청초수물회로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대기팀이 46팀이다... 포기하고 다른 집으로 가려다가 어딜 가나 맛집은 비슷할 것 같아 그냥 기다리다 보니 30분 좀 지나 우리 차례다. 명불허전 해전물회 한 그릇에 더위가 싹 가시는 기분~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드디어 설악산 국립공원 입성하여 토왕성 폭포로 출발! 비가 올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세상 쨍한 날씨에 오히려 더위를 먹을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그래도 설악산 코스 중에 (케이블카 빼고) 가장 쉬운 코스이니 살방살방 걷기 시작한다. 키가 큰 나무들이 많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걱정만큼 덥지 않고 첫 번째 육담폭포 전까지는 거의 둘레길 수준의 트레킹이다.
소공원 근처의 하류에는 물이 많지 않아 폭포가 어떠려나 걱정했는데 주중에 비가 많이 온 덕에 폭포수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엄마도 추자도 트레킹 때보다는 덜 힘들어하셔서 육담폭포에서 잠시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출발. 흔들다리를 건너 비룡폭포 향하는 길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비룡폭포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발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조금씩 뒤로 처지던 엄마와 여동생은 비룡폭포에서 발 담그고 있겠다며 중탈 선언. 토왕성 폭포까지 오르는 악명높은 900개의 계단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육담-비룡 구간과 비룡-토왕성 구간이 거리는 400미터로 같은데 예상시간은 10분 vs 40분인 이유가 납득이 되는, 정말 끝도 없는 계단 지옥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헉헉대며 한참을 오른 것 같은데 고작 100미터 왔다는 이정표에 남동생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다. 요새 장마로 런닝을 하지 않은 티가 난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가끔 욕도 하면서) 천천히 오르니 드디어 목적지 도착. 올라도 올라도 물소리가 나지 않아 좌절할 뻔했는데 생각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전망대인지라 쾌청한 하늘을 배경삼아 그 자태가 더욱 웅장하다. 육담폭포나 비룡폭포도 좋지만 토왕성폭포는 정말 쉽게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한다. 저 꼭대기에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물이 모여 떨어지나 신기하기도 하고, 긴 폭포의 장쾌한 물줄기에 감탄이 절로 난다.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낸 남동생은 멍하게 폭포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고른다.
다시 내려가는 900개의 계단, 힘겹게 오르는 이들에게 화이팅 한 번 외쳐주고 후루룩 신나게 내려온다. 비룡폭포, 육담폭포를 되짚어 내려오는 길. 습한 날씨에 티셔츠는 이미 쫄딱 젖었지만 덕분에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어 외려 더 시원하다. 소공원 매점에 도착하자마자 포카리 스웨트를 한 통 사서 순식간에 나눠마시며 전해질을 보충한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 후 울산바위를 병풍 삼아 에어컨 바람 아래 야구를 보고 있자니 세상 시름이 잊혀지는 기분으로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한다.
Day 2 사람들이 몰리는 토요일인지라 대충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일찍 숙소를 나서 다행히 가까운 곳에 쉽게 주차하고 소공원으로 입장. 어제 입장료를 냈는데 오늘 또 4,500원을 내려니 살짝 아깝긴 했다 (+ 주차비 별도).
오늘 가는 울산바위 코스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흔들바위까지 가봤던 거 같은데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나마 울산에서 금강산까지 가려다 일만이천봉이 마감되었다는 얘기에 주저앉았다고 하는 설, 울창한 숲이라 울산이라 부른다는 이야기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어제보다 더 뜨거워진 땡볕 아래 신흥사를 지나니 그제서야 키가 큰 나무숲이 나오고 덕분에 그늘을 걷을 수 있게 된다. 평탄한 숲길이 이어지고 연이틀 산행(?)을 걱정하던 엄마도 무리없이 잘 따라오신다.
전체 코스의 1/3 정도 지나니 흔들바위를 향하는 본격 오르막이 시작된다. 심하게 가파르지는 않지만 덥고 습한 날씨 덕에 오늘도 열일하는 땀샘. 어제의 경험으로 오늘은 아침부터 포카리 스웨트를 여러 통 지고 온 덕에 목이 마르기 전에 미리미리 수분 보충을 해준다. 적당히 오르고 나니 드디어 흔들바위와 계조암 석굴이 보인다. 분명 왔었는데 마치 처음 본 듯한 흔들바위 앞에서 인증샷도 찍고 잠시 땀도 식힌다.
역시나 엄마와 여동생은 여기까지. 남동생과 제부와 함께 울산바위를 향해 조금 더 가팔라진 오르막을 향한다. 하지만 이내 등장한 계단을 보더니 어제 900개의 계단에 질색한 남동생은 gg를 선언하고 흔들바위로 돌아간다. 아직은 서로 낯가리는 제부와 어색하게 산을 오른다. 어제 토왕성 가는 길만큼은 아니지만 울산바위도 막바지에는 계단 지옥이 시작된다. 고소공포증이 심한 제부는 계단 안쪽 벽에 찰싹 붙어서서도 용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오른다.
한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태양을 마주하며 걷는 계단길에는 거의 100보에 한 명씩 드러누운 산객들이 보인다. 어제 계단 후유증으로 오늘 계단에서 다리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울산바위의 멋진 풍광에 씁씁후후 호흡을 고르며 중간중간 수분도 보충해주며 그렇게 쉬엄쉬엄 오른다. 드디어 도착한 울산바위 전망대.
길다란 울산바위의 모양 덕에 전망 포인트가 여러 곳이다. 고소공포증인 제부는 난간 근처도 가지 못한 채 손을 후덜거리며 간신히 내 사진을 찍어주신다.
멀리 속초 앞바다와 우리 숙소인 소노문의 스톤 헨지를 내려다보니 괜히 더 뿌듯해진다.
더 안쪽 전망대까지 가니 반대편으로 대청봉이 내다보인다. 7월 말 중청대피소를 예약했으니 곧 갈게, 기다려 대청아! 인사 겸 당찬 포부를 전하며 이제 하산.
이틀 연속 산행에 더운 날씨 때문인지 땀에 절어 하산길도 몸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대청봉까지 가려면 집 근처 남산이라도 꾸준히 훈련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시 흔들바위까지 내려와 기다리던 가족들과 함께 신흥사까지 되짚어 내려간다. 비가 꽤 온 것을 생각하면 신흥사 앞 계곡의 수량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토왕성 폭포가 더 신기해지는 순간). 이고 지고 온 포카리와 얼음물도 모두 동이 날 정도록 무더운 날씨에 점점 기운이 축나는 느낌이 들어 가장 가까운 막국수 집으로 이동해 허겁지겁 점심을 먹는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잠시 쉬다가 속초 중앙시장에서 회를 뜨고 주전부리용 닭강정과 술떡, 강정까지 잔뜩 사와 푸짐한 저녁으로 보람찬 하루를 마무리한다.
토왕성폭포 코스와 울산바위 코스는 1/3씩 기준으로 '평지 둘레길 - 완만한 오르막 - 가파른 계단'으로 설악산 다른 코스들에 비해 평균 난이도는 낮지만 등린이라면 막판 힘든 구간을 위해 페이스 조절을 잘해둬야 할 듯하다. 하지만 쉽든 어렵든 어느 구간에서도 눈만 들면 보이는 설악산의 수려한 산세와 반짝이는 계곡 덕에 눈과 귀가 즐거운 산행을 만끽할 수 있다.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설악산까지 정상에 오르고 나면 진짜 등린이는 졸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땐 기다려 공룡!이 되겠지).
[요약] 1. 코스: 소공원 - 육담폭포 - 비룡폭포 - 토왕성폭포 - 원점회귀, 총 5km, 2시간 운행 소공원 - 신흥사 - 흔들바위 - 울산바위 - 원점회귀, 총 4km, 4시간 운행 2. 기온: 21/30, 습도 60% 3. 착장: 반팔티, 반바지/레깅스 4. 기타 준비물: 벌레기피제, 선글라스 5. 장점: 두 코스 다 초반 쉬움 (비룡폭포, 흔들바위까지는 살방) 6. 단점: 두 코스 다 막판 계단 지옥 (토왕성폭포 직전 지옥의 900계단, 울산바위 막판 철계단은 고소공포증 있으면 힘들 듯) 7. 다음 방문 계획: 7월 말 대청봉 고고!
[별점] 1. 난이도: 3.0 (완만한 구간과 가파른 구간의 차이가 크다) 2. 풍경: 4.0 (오늘 완전 날씨요정님 강림) 3. 추천: 4.0
[오늘의 교훈] 1. 여름 산행에는 물과 포카리 스웨트를 넉넉히 들고 오르자. 2. 알고 보니 나도 땀쟁이였다! 가방에 여유가 있다면 수건과 여분 티셔츠도 준비하자. 3. 나 같은 저질체력에겐 무박 설악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 숙소를 잡고 체력관리 잘하고 오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