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대피소를 경험한 이후 설악산도 대피소에서 하루 자고 조금 여유롭게 등정해보고 싶었다. (나는 블랙야크 100대 인증을 하는 것도 아니라 굳이 최단코스 & 정상 인증을 할 필요도 없다.) 친구 한 명이 금요일 휴가에 노력해보겠다고 해서 하계 대피소 추첨에 신청해두었고 다행히 두 번의 금요일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일기예보를 들여다봐도 금요일마다 곰탕이 가득할 기세였고 친구의 휴가도 어려워질 것 같아 매일 일기예보와 대피소 예약만 들여다보다가 그나마 일기예보가 나은 27일 취소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동행인 친구와 둘이서 번갯불에 콩 볶듯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지리산 경험이 있어서 한결 수월하긴 했다) 마지막 남은 버스표까지 간신히 예매 성공. 지난번 지리산보다 일행이 단출해진 관계로 비화식으로 가기로 했고 날도 따듯해진 덕에 챙겨갈 옷도 한결 가벼워졌다.
8시 30분, 동서울 터미널에서 만나 한계령으로 출발.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해 황탯국으로 든든히 속을 채워주고 장비 정비 후 씁씁후후 준비운동까지 빼먹지 않고 설악과 만날 준비 완료! 급경사의 최단코스 오색에 비해 한계령 코스는 조금 멀긴 하지만 절반 정도만 오르면 조망이 터진다.
토왕성 폭포와 울산바위 코스에서 눈으로 보기만 했던 수려한 설악의 산세에 막상 내가 올라타고 보니 새삼 감회가 남다르다.
물론 중간중간 발바닥에 불이 날 것 같은 뾰족뾰족한 돌밭 구간이 과연 내가 악산을 오르고 있구나,를 실감하게 해주기도 한다.
대피소를 예약해둔 덕에 오늘은 오르기만 하면 끝이다, 라는 생각으로 서두르지 않고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찬찬히 오른다. 길고 거친 서북능선에 힘이 살짝 부치기도 했지만 친구가 이럴 때 먹어줘야 한다며 나눠준 에너지 젤 덕에 다시 급속충전하며 끝청에 도착하니 구름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그림 같은 풍경이 우리를 맞아준다.
끝청의 멋진 풍광에 서북능선의 고단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이제 오늘의 잠자리인 중청대피소까지 남은 구간도 그리 멀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다시 으쌰으쌰 힘을 내본다. 드디어 중청대피소에 도착해 둘러보니 구름양탄자가 더욱 포송포송 탐스러워진 느낌이다.
잠시 땀을 식힌 후 무거운 배낭을 벗어두고 살방살방 대청봉으로 향한다.
낮시간이나 주말이었다면 정상 인증을 위한 기나긴 줄이 이어졌을 텐데 중청대피소 숙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조용한 대청봉의 해넘이를 한껏 누려보기로 한다. 몇 년을 산에 다닌 친구도 이런 장관은 흔치 않았다며 날더러 날씨 요정이나 묻는다. 비행기에서나 보던 운해를 직접 내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되지 않을 만큼 운해와 산그리메와 해넘이의 환상적인 콜라보에 그저 감탄만 연발이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대청 스튜디오를 단독으로 빌린 것 같다며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다.
뉘엿뉘엿 지는 고운 햇님에게 부디 우리 내일 다시 만나요, 인사만 백 번 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이제 저녁식사를 위해 대피소로 돌아간다. 어스름이 깔리고 대피소 조명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자 구름바다는 이제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비화식 메뉴로 준비한 양념꼬막를 따뜻하게 데운 햇반에 김가루와 함께 얹어 먹으니 산해진미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꿀맛이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스카이라운지라며 간단히 준비한 카나페에 가볍게 와인도 한 잔 곁들이니 정말 온 세상이 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대피소 음주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있지만 기분상 작은 잔와인을 구입했고 알쓰인 나와 친구는 그마저도 다 마시질 못했다.)
새벽 4시 반, 일출 알람에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더니 어제의 그 구름바다가 중청대피소까지 올라왔나 보다. 일출은커녕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아 오히려 속편하게 다시 잠을 청한다.
8시쯤 주섬주섬 일어나 옷과 장비를 재정비하고 아침 요기를 하며 이제는 하산만 남았다며 기쁜 마음으로 출발한다. 소청을 지나 멀리 보이는 공룡능선도 살포시 구경하며 희운각과 천불동 계곡 쪽으로 하산을 계속한다.
오늘 하산길은 어제의 그 구름바다 속으로 풍덩한 채 걷는 듯 시계가 흐렸지만 가끔 바람에 구름이 밀려 웅장한 속살을 내보여주기도 했고 뽀얀 안개가 나름 운치도 있었다. 공사 중인 희운각 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귀여운 청설모와 눈도 맞춘다. 천불동 계곡의 아기자기한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막상 카메라에 그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함에 안타까워하며 걷고 또 걷다 보니 양폭 대피소가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드디어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땅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더니 올 들어 벌써 세 번째인 신흥사와 소공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작년 한라산 백록담, 올봄 지리산 천왕봉에 이어 설악산 대청봉까지 무사히 등정하고 나니 나도 이제 어엿한 산악인이 된 듯하다 (정작 북한산 백운대와 관악산 연주대는 아직 못 가본 1인). 산꾼들이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운해의 장관을 첫 대청봉 도전에서 호사롭게 누렸음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첫 술에 배부른 대청봉, 어여쁜 모습으로 또다시 만나자!
[요약] 1. 코스
Day1. 한계령 - 서북능선 - 끝청 - 중청 - 대청봉 - 중청대피소 1박, 총 8.8km, 5시간 운행 Day2. 중청대피소 - 소청 - 희운각 대피소 - 천불동 계곡 - 소공원, 총 10.7km, 4시간 45분 운행 2. 기온: 20/31, 습도 90% 3. 착장: 반팔티, 레깅스 (+ 안다르 집업,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4. 기타 준비물: 벌레기피제, 선글라스, 스틱, 무릎담요, 샤워 티슈, 에너지 젤 5. 식사메뉴: 양념꼬막(+대피소 햇반), 카나페(+편의점 잔 와인), 김가루 6. 장점: 대청봉의 꿈같은 운해 6. 단점: 한계령 코스는 거친 구간이 있고 천불동 코스는 길다. 7. 다음 방문 계획: 공룡능선,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