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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돕 Jun 21. 2024

산이 좋아서

푸르름이 주는 위로

오늘 집 근처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 다녀왔다. 계속 계속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약속이 있어 날이 너무 더워서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 있다가 다음 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아니면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누군가 같이 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혼자 가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나만의 속도대로 천천히 보고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요 며칠 불볕더위가 시작되어 해가 정말 뜨거웠다. 이젠 여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날씨였다. 하지만 산 초입에 다다르자 공기부터 달랐다.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들이 해를 등지고 시원한 팔로 나를 감싸주는 듯했다. 산속은 시원했고 간간히 바람도 불어 걷기 좋았다. 산속에 한 발을 내디뎠을 때 마치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조금 걷다 보니 웬걸.. 좀처럼 땀이 나지 않는 나도 오늘은 이마 위, 가슴골 아래로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아 이제 정말 여름이구나. 이제 산속도 여름 한가운데에 있구나 싶었지만 잠시 앉아 쉬고 있으면 산들바람이 금방 땀방울을 걷어갔다.


여름숲엔 꽃은 지고 없지만 꽃 못지않게 아름다운 초록초록 잎사귀들이 만발해 눈호강을 시킨다. 여기저기 짙푸른색을 뿜어내는 잎사귀들이 내 눈을 환하게 한다.


오늘은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빛들이 땅 위를 수놓은 듯한 장면을 발견하고 황홀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엔 주로 나무나 하늘을 바라보고 감탄하며 걸었기에 땅을 쳐다본 적은 많이 없었다. 그래서 흙길 위에 군데군데 몽우리진 햇살이 꼭 꽃을 피운 것처럼 이뻐서 한참을 쳐다봤다. 땅 위에 몽글몽글 피어난 햇살이 바닷물 위에 아른거리는 흰 빛 보석 같기도 했다.


그동안은 왜 보지 못했을까. 하늘과 빛과 땅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아마 내가 일상을 잃어본 사람이기에 새로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잃어 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 산속을 걸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같이 갈 때는 수다 삼매경에 새소리는 그저 키 낮은 배경음악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가는 길 오는 길 내내 이런저런 새소리에 여러 번 걸음을 멈췄다. 새소리뿐 아니라 나뭇잎 바스락 거리는 소리, 까치들이 나뭇잎 위에 총총 거리는 소리. 사람의 눈길이 미치자 놀라 푸드덕 날아가는 새소리를 듣다 보니 내가 새들이 사는 집에 놀러 온 손님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가끔 고속도로를 지나치다 끊임없는 터널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때도 나는 감탄했었다. 어떻게 산 한가운데를 뚫어 이렇게 길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에 대한 찬사였다. 이 산에 올 때도 항상 감탄했다. 잘 정비된 둘레길, 산 중턱에 드문드문 마련된 벤치와 운동기구들, 시시 때때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나무들을 칭칭 감아놓은 야무짐, 울타리 안 깊숙이 결대로 크기대로 한 뭉텅이씩 잘 모아놓은 나뭇가지 더미.


애완견을 입히고 먹이고 가꾸는 사람들처럼 산의 모든 것을 잘 관리하는 사람에 대한 찬사였다. 그들 덕에 내가 이곳을 이리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들 덕에 내가 오롯이 나무와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이곳을 걸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언제 와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새순이 돋아났다 꽃을 피우고, 녹음을 퍼뜨린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노쇠해져 잎사귀를 떨구는 나무들, 앙상한 가지만 남아 비바람, 눈보라에 흔들리다가도 어느새 또다시 그 자리에서 묵묵히 새순을 피워내는 나무들. 나무에 붙어있는 벌레들, 잎사귀에 늘어 붙은 송진, 뜨겁게 익어가는 그들을 보며 내 청춘이 생각났고 속절없이 흘러간 내 인생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마음도 순간이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울적한 마음에도 활기가 도는 게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이 불볕더위에도 산을 찾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도 걷기에 집중해야 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요즘은 정말 맨발 걷기 하는 사람이 많다. 오늘은 더워서 더 그랬는지 내가 본 사람들 중 절반은 맨발로 걷고 있었다. 산 중간중간 얕은 웅덩이나 작은 시내가 있는데 그곳에서 발을 헹구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산에 오면 가슴이 탁 트이고 생의 활기가 느껴진다. 사시사철 그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는 나무, 바위, 풀들의  생명력. 또 사람들.  재래시장에서 느끼는 삶의 활기와도 비슷한 것 같다. 머리 센 할머니,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의 힘찬 내딛음, 작은 배낭을 메고 양손에 스틱을 잡고 라디오를 들으며 각 잡고 걷는 중년의 여인들,  땀을 흘리며 걷는 젊은 커플, 4~5살 되어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고 가는 엄마, 숲 체험을 나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학생들,  


등에 자벌레가 붙었다며 날 불러 세워 벌레를 떼어주는 이름 모를 등산객. 벤치에 쉬고 있으면 저 밑 어딘가에 망초가 있으니 뜯어서 무쳐 먹으라며 고급 정보를 주는 아주머니. 그래서 홀로 있지만 또 같이 있고 싶어, 고요하고 싶지만 생의 활기를 느끼고 싶어 내가 산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산에서 분명 좋은 기운을 받고 돌아왔는데 집에 오니 다시 이런저런 걱정과 번뇌가 피어오른다. 그래서 다음 스텝을 밟는다. 우울할 때만 답답할 때만 쓰지 않으려 했는데 역시 내가 돌아올 곳은 이 넓고 하얀 공간이다. 여기서 다시, 오늘 만난 산에 대한 감회를 풀어놓으니 조금은 마음이 푸르러지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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