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다

엄마외 딸

by 스돕


인생에서 큰 일을 겪거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새로 태어났다고들 한다.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습이 크게 변화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난 말 그대로 정말 새로 태어났다.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싹 바뀌었기 때문이다. 백혈병 치료는 여타 암들과는 달리 기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백혈병이라고 하면 “그럼 몇 기야?” 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병은 몸을 도는 피에 문제가 생기거나, 피를 만들어내는 골수 자체의 문제이기에, 유전자 타입, 돌연변이 유무에 따라, 예후가 좋음, 보통, 나쁨으로만 나뉘었다.


나 같은 경우 특별한 돌연변이는 없었지만 ‘보통’ 예후에 속했던 터라 골수 이식을 권유받았다. 항암으로만 끝낼 수도 있지만, 차후 재발의 위험이 있어 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백혈병을 진단받기 전, 제발 백혈병만 아니기를 바랐던 것처럼, 이번 항암을 하면서도 제발 이식만 안 하기를 바랐다. 이식전처치를 포함한 이식 후에 오는 부작용, 합병증도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식 결정이 내려지고 나서, 내 하나뿐인 동생의 유전자가 부적합하다는 것은 물론(형제 이식이 가장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다) 내 유전자와 일치하는 타인 공여자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이식을 할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라는 선배 환자들의 조언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결국 주치의 선생님이 만일을 대비해 히든카드로 쥐고 있던 우리 큰 딸이 나의 공여자가 되었다. 당시 우리 큰딸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덩치도 나보다 컸지만 내 눈엔 고작 어린아이였다. 아직 피지도 못한 아이의 몸에 손을 댄다고? 그것도 나 때문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처음 입원할 때 아이들은 당연히 엄마가 왜 병원에 가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럴 때마다 신랑과 나는

“엄마는 남들보다 피가 조금 모자라서 그런 거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럼 딸아이는

“엄마 내 피 나눠줄까? 나 피 많아”라고 했었는데.. 정말 그런 날이 올 줄이야..


씩씩하게 엄마에게 피를 나눠줄 거라고 공언했던 첫째도 막상 입원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많이 무서워했다. 왜 안 그러겠는가. 주사 한방에도 벌벌 떠는 아이였는데…아이를 둘이나 낳아 본 나도 주사라면 질색을 하는데.. 이식전처치를 위해 먼저 무균실로 입원한 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딸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요즘에는 골수에서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헌혈하듯이 하는 거라 어렵지 않아요. 요 옆방 애기는 9살인데 5살 동생한테 기증받았어요.”


“엄마 살리려고 피 좀 나눠주는데 뭐가 힘들어. 나중에 저 때문에 엄마가 건강해졌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도 엄청 뿌듯해할 거야.”


간호사, 가족, 지인들이 하는 위로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예정대로 아이의 피를 이식받았고, 아이도 무사히 퇴원을 했다. 이식 후 아이도 건강검진을 했다. 혹시 나 때문에 이상이 생기는 거 아닐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신랑은 아무 이상이 업다고 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이식 전처치 항암으로 지옥을 맛보던 중인 나는 중간중간 남편이 보내주는 아이의 입원 사진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꼭 다 나아서 오래오래 너희 옆에 있어줄게.”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루빨리 회복해 아이들, 가족들과 함께 할 날만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만 빌어 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퇴원 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나는 그때의 다짐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어느새 중학생이 된 딸아이는 고맙게도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지만 때때로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던 중2병을 시전 하며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너무 낯선 딸아이의 모습에 한숨을 푹푹 쉬고 혀를 쯧쯧 차게 된다.


하지만 딸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는 날이면 그런 감정이 싹 사라지고 만다. 혹시 나한테 피를 나눠줘서 몸이 약해진 건 아닐까? 면역력이 떨어진 건가? 제발 제발 아프지만 말아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이게 맞는 것 같다.

그러면 내 마음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