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주혜 Aug 24. 2023

사랑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이규리  <사랑의 다른 이름>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작가님이 문학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꼈어요.' 신간으로 발표한 나의 글, '읽기의 의미'를 읽고 몇몇 독자들께서 직접 메시지를 보내주곤 하셨다. 나의 글을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글 속에 담아낸 나의 진심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메시지라는 한계가 있어서 더 깊은 대화는 나눌 수 없었지만, 나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의 책 속에는 내가 문학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라는 마음도 담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사랑이라 느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문학을 빌린다고 말이다. 문학은 사랑에 대한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보다 더 자주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걸 나타내고 싶었다. 수단으로 사용하는 문학에게 나는 언제나 빚을 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고맙고, 언제나 필요하다고. 사랑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학, 그렇기에 사랑하는 문학. 문학이 오늘날 내 삶에 존재하는 이유다.


심리학은, 이를 전공한 사람들의 문장들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원인 규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마음에 대한 결론을 향해 써 내려간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방식의 접근으로 인간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그렇기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물론 심리학적인 지식에 대한 깊이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하나의 학문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접근보다 언제나 열린 결말과 같은 문학의 방편을 선호한다.


간혹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거나, 스타일, 취향, 계획과 선택, 심지어는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불편한 만남 뒤에는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운다. 물론 그 과정을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전환해 그가 이토록 한 개인 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를 생각했을 때 그의 사정을 알아가도록 노력하기도 했으며 그 노력에 대해 좋은 결말을 얻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원인 뒤에 뒤따라오는 다양한 삶의 모양들, 흩어지는 파편들의 조각들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면 언제나 문학의 방편을 찾는데, 그 과정은 언제나 괴롭고 외로운 여정이다. 때로는 이 여정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비난까지 짊어지고 간다. 어떠한 결말을 향해가는 것이 아닌, 그 여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문학의 모든 영역에서 언제나 정수의 위치에 있다. 시인들의 머릿속은 아마도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어떤 한 집단 지성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시인들이 가진 생각의 회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면. 삶을 그저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고 방법이 꽤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예를 들면 이렇다. 흔히 계절이 변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시인들은 반복되는 지구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 반복되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 역시 나이가 들지만 무엇인가를 반복하며 반복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한 개인이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그 힘으로 결국 자신의 모습이 완성되고 그 완성된 모습이 언젠가 끝을 맺으면 또 다른 반복이 탄생한다는 결론까지 이른다. 한 사람의 생. 시인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그 생을 바라본다. 이것은 보통의 생각 회로에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맛있고, 편안한 곳에 앉으면 편안하다는 것이 전부다. 맛있는 과정, 편안한 과정 또는 그 이후의 과정을 찾아가고 탐색하는 일은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 여정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되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의 비난이나 멸시를 또한 감당해야 하는 일임으로 외로운 일이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야 하며, 그 부분에서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확연하게 뛰어난 것이 아니라면 가끔은 좌절도 경험할 각오는 갖춰야 한다. 물론 성공이라는 영역은 또 다른 부분이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결국엔 사랑하기 위하여 문학을 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이어졌고, 이 문장의 과정과 끝에는 외로움의 여정이 있다는 사실까지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이라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수많은 예술이 의미를 표명하려 애를 썼지만 모든 것은 추측으로 남았을 뿐, 명확한 실체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은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랑을 찾기 위한 여정 또한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여정에 놓여 있든, 여정에 대한 결론을 누군가 알게 됐든, 사랑은 어떤 위치에서든 명확할 수 없다. 어쩌면 명확해짐과 동시에 이는 사랑이 아닐 수도.


다시 시인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계절을 대하며 반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 시인들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인들은 사랑해야 할, 또는 사랑했다고 믿는,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사랑이라 명명하며 시를 완성한다. 그 모든 과정이 '사랑'으로 가는 모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에게 사랑은 목적이며 수단, 과정 그 모든 것에 존재하는 무엇이 되는데 이를 어떤 한 단어로 명확하게 명명하지 못할뿐더러, 할 수 있다고 해도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 사랑의 무한함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표현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구체화시키는 이들이 멋있다. 누구도 완성할 수 없는 그 영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또 실패하고, 그 과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삶으로 체득하는 이들이 진정 자신만의 삶을 채우는 사람들이라 믿고 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과 이상이라 여기며 과시하는 단면들에 자신의 삶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사랑을 찾아 헤매고 때로는 믿고, 때로는 의심하여 써 내려가는 서사가 즐겁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랑했던 그 무엇으로 시작하고 결국엔 사랑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결론으로 남는다. 어쩔 수 없이 흩어지고 마는 우리의 사랑들은 또다시 누군가의 사랑이라는 착각에 힘을 실어주면서 사라진다. 그래서 사랑이란 매력적이다.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다. 이상한 시인들이 사랑을 끊임없이 시로 옮겨 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 돈 안 되는 그거를 왜 하려고 해요. 투자 가치도 없는 그거를 뭐 하겠다고 매달려요.' 누군가는 사랑을 글로 써 보겠다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말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자신이 사랑이라 써 놓은 글에 대해 사랑과 어울리지도 않는 자본주의의 방법들을 다 동원하여, '나 어때요, 이 정도면 꽤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하며 사랑의 형체를 억지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이를 사랑이라 읽어라, 하며 강요한다. 그런 사랑 아닌 사랑은 역겹다. 그렇다고 고상하게 '사랑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요, ' 하며 타령을 늘어놓고 있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사랑을 사랑이라 표현할 수 없으니 사랑이라 존재하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뛰어넘는 그 영역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언젠가 흐릿하게나마 경험했었던 그 사랑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리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던 모든 단어들을 다시 한번 써 내려가보며 말이다. 혹시 아는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한 부분 때문에 나의 인생이 사랑스러워질지도. 사랑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나의 사랑은 어디에.



작가의 이전글 거의 모든 것의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