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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11. 2023

견디는 삶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사실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나의 생을 돌아보게 했고, 그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나의 생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다만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긴급하게 누군가는 저 먼 곳으로부터 또 누군가는 갈급하지만 끝내 다다르지 않는 것으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죽음을 아직 마주하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내가 과연 완성된 문장으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생각 끝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오늘날 죽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살아있는 나로 죽음을 생각하는 오늘이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채운 하루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연속성 가운데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은 언제나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그 시작이 생을 마주하는 현실이며 나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나의 글은 죽음에 대하여 써야 하는가. 아니면 살아있음을 써야 하는가. 그 생각의 끝에 나는 서 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는다.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죽음에 대해 써야겠다.'


동물보다 사람이 너무 많은 이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면 아마 먹이 피라미드의 형태가 이미 변형된 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형태를 본래의 모양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동물을 수를 인위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동물이 자연으로부터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환경에서 인간의 지배를 받아 인간의 계산으로 그들의 생태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그 결과를 위한 과정은 동물의 생을 고려하지 않는 형태로 조금씩 더 발전하고 있었다. 동물이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들이 상실된 환경은 인간에게 익숙해져 갔고 그 익숙함은 우리의 정서를 넘어 존재의식으로까지 확장했다. 동물들은 지금도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생으로 살아간다. 동물들에게 생을 위한 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이들에게서 '나이 듦'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동물에게는 늙어간다는 현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건강하고 가장 활동성이 좋은 때에 그들이 태어난 이유에 대한 역할이 주어졌다. 바로 죽음이다. 동물들의 이러한 생에 대한 감각에 대해 인간이 예민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이미 이러한 환경과 시스템에 대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변형된 피라미드를 수정한 피라미드' 속에 갇혀 있는 인간. 인간이 만든 오랜 파괴의 역사로 지금은 오히려 인간이 위험을 감지한다. 위대로운 순간이 곧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피라미드가 온전치 않다.


우리 집 앞에는 식육식당이 하나 있다. 식육식당 앞에는 소와 돼지의 모양을 그려놓은 입간판이 서 있다. 소와 돼지의 모양을 그려놓고 그들의 몸을 부위별로 나누었다. 부위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 옆에 소와 돼지의 얼굴로 만든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데 소와 돼지는 귀여운 표정으로 웃고 있다. 캐릭터들이 '나는 죽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건지. '나는 아주 맛있는 상태로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는 여기에서 식육식당에서 소와 돼지를 먹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고 싶거나 이제 우리가 채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권유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나는 철저히 인간에 의한 생각, 인간 위주로 생각한 생태계의 질서에 대하여 우리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하고 논의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식육식당의 주인아주머니는 우리 집 반려견 고동이가 산책을 나설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 친절한 분이시다. 가게 앞에서 국화빵을 파는 젊은이에게도 기꺼이 주차장 공간을 제공해 주셨던 좋은 분이다. 아주머니의 생에 소와 돼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도와주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그 식당을 열면서 아주머니는 장사가 잘 되어서 노후는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다. 아주머니는 그런 평범함들을 꿈꾸면서 건강한 마음으로 매일 아침 식당 문을 열며 새로운 꿈을 꾼다. 소와 돼지의 얼굴을 한 캐릭터가 웃고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소와 돼지가 아닌 아주머니의 미소였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소와 돼지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그저 고깃덩어리들이 식육식당으로 들어올 뿐이고, 그 덩어리들을 손님들에게 내어 줄 뿐이고, 오늘 장사가 잘 된 날이면 아주머니는 편한 내일이 그려질 뿐이다.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이 더 가까이에, 더 자세히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어느 죽음이 보인다. 그래서 불편하다.


나는 식육식당 아주머니에게 그 어떤 비난을 할 생각이 없다. 당연히, 그럴만한 일은 하지 않으셨다. 나는 한 인간의 생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중에 하나인데 그러나 그전에 이 비뚤어진 먹이 피라미드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의식이 우리들의 공동체에 더 많이 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피라미드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공장식 축산의 실태를 바르게 알고 이로 인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동안 불필요하게 죽음으로 내몰렸던 동물들의 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동물들의 축산환경의 악화로 동물들의 생이 위협당하면 온전한 삶을 유지하고자 했던 한 식당의 아주머니도 하루아침에 주저앉는 일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제역과 AI 등 다양한 전염병의 형태가 동물들이 살아가는 환경 때문에 더 큰 위기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물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개선하고 바꿔야 하는 것이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 내지 못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시장 경제에서 수요의 영역, 즉 인간이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을 동물들의 숫자, 즉 공급의 영역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배할 수 없거나 또는 '고기'라는 카테고리로 또 인간 사회에 계층이 만들어지기를 우려하는 목소리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공장식 축산'의 형태를 암묵적으로 동의해 왔고 당연시해 왔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욕망을 따라가 만든 시스템에 불과할 뿐이며 동물의 생과 생의 과정,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모든 영역에서의 고려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감수성이 동물의 생으로 조금 더 기울 수 있다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먼저 동물의 생을 고려하기 이전에 인간의 생에 대해 우리가 조금 더 진지하게 논의하는 과정이 활발해지리라 생각한다. 먹는다는 것,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는 것, 나아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비로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나 자신과 타인의 생에 대하여 인정과 존중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삶 외에 다른 사람의 삶이나 또는 다른 존재들의 삶을 고려하거나 헤아리는 마음이 부족한 사람이다.

누군가의 삶의 한 단면을 바라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안다고 이야기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 생각이 나의 삶의 정서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누군가를 오해하는 일도 적다. 상대방의 뒷모습을 때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뒷모습이 그 사람의 모든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도 그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때로는 나의 어떤 날의 컨디션이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이다. 어쩌면 인간이 동물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관념과 사고들이 인간이 태어나 동물의 생에 대하여 단면들만 바라보기에 생기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동물들의 모습이 아닌 죽은 채 덩어리가 되어 있는 동물들만을 바라본 우리였기에 동물이 오직 '먹을 것'으로 어떻게 전시가 되어 있어도 문제의식이 없었으며 우리의 삶과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무지다.


농장이라 불리는 공장의 수많은 동물들은 오늘도 자신의 생을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가 우리의 생을 말할 때 '버티는 거지 뭐.'라고 한탄하며 보내는 삶과는 전혀 다른 생의 모습이다. 그들은 오직 죽음을 향해 살을 찌운다. 인간의 삶은 버티고 견디기만 하면 되는 무료한 삶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보다 더 연약한 그들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힘이 우리에게 있다. 죽어 있는 생이 아닌 온전히 살아있는 생을 보겠다는 의지가 모이면 온전히 늙어가는 자연의 아름답고 위대한 섭리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살아있는 생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많은 죽음을 시작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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