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에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원두를 직접 내리기가 살짝 귀찮았다. 남편이 지난 강릉 출장길에 가져온 핸드드립커피를 마셔보기로 했다. 별 기대 없이 포장을 뜯었는데 향이 꽤 좋았다. 맛도 훌륭했다. 내 입엔 커피계의 에르메스니 어쩌니 하는 Bacha커피보다 훨씬 좋았다. 그제야 박스에 적힌 COFFEE BOLLD가 눈에 들어왔다. 검색해 보니 강릉의 유명 카페였다.
총 다섯 가지가 들어 있었다. 블렌드Ⅰ, 과테말라 엘 인헤르또 Washed, 에티오피아 구지G1 우라가 Natural, 콜롬비아 빅토리아노 수프리모, 에티오피아 코케허니 예가체프 G1. 지금껏 커피 이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자주 마시는 원두의 맛과 이름을 기억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커피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었다. 블렌드야 커피 원두를 적절히 혼합해 만들었다는 의미일 터였다. 다른 명칭들은 혼란스러웠다. 원산지와 농장 이름, 가공법이 적혀 있기도 하고 등급, 심지어 아내 이름까지 쓰여 있기도 했다. 등급 명칭도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가 달랐다. 다섯 가지 중에 케냐 커피는 없지만 거기도 다른 걸로 알고 있다. 명칭에 어떤 정보까지 담을지는 생두 생산자든, 커피 회사든 누군가의 마음에 달린 듯했다. 일관성이 있으면 커피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어쩐지 아쉬웠다.
투덜거리다가 내가 학생이던 시절 직접 발견한 유전자를 미국 국립생물정보센터(NCBI)에 냈던 게 떠올랐다. 유전자 특징 그대로였지만 아무튼 내가 작명했다. 오랜만에 기억을 더듬어 찾아봤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출했던 정보 그대로였다. 잠시 시간을 거스른 듯한 기분이었다. 등록된 날 참 뿌듯했었다. 실험실에서 과자 파티도 했었고……. 회상은 여기까지.
과자, 하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커피를 마실 때면 옆에 쿠키나 초콜릿, 빵을 함께 놓곤 한다. 커피 특유의 맛과 향이 달콤한 디저트와 꽤 잘 어울리기야 하지만 가끔은 커피 자체를 마시고 싶은 건지 디저트를 먹고 싶어서 커피를 마시는 건지 헷갈린다. 나는 요즘 후자 쪽인 것만 같다.
아무튼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물을 마시는 시간과 결이 다르다. 괜히 사색에 잠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커피를 옆에 두곤 한다. 물은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이고 커피는 무용하되 아름다운 창작과 상상에 더 잘 어울려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