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활보

by 괜찮은 작가 imkylim

뉴스를 보는데 ‘가해자가 보란 듯 활보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욱일기 벤츠 활보, 여장 남성 도로 활보, 흉기 들고 도심 활보, 속옷 활보, 동물원 탈출한 얼룩말 대낮 도심 활보……. 이쯤 되면 ‘활보’는 다닐 자격이 없는 자가 허락되지 않은 곳을 마구 돌아다닌다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정말 그런 뜻뿐일까요?


* 활보(闊步)

① 큰 걸음으로 힘차고 당당하게 걸음, 또는 그런 걸음.

② 힘차고 당당하게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마구 행동함. 또는 그런 행동.


①번 의미만 놓고 보면 너른 곳을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실제로 활(闊)은 넓다, 트이다는 의미로 활엽수, 광활하다, 쾌활하다, 활달하다에 쓰여요. 넓고 시원한 느낌이지요. 캠퍼스를 활보하는 청춘, 시험을 끝내고 운동장을 활보하는 아이들, 건강을 회복해 공원을 활보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써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실생활에서는 ②번 의미의 ‘제멋대로 마구’에 치중한 활보로 굳어진 듯합니다. 감히 속옷만 입은 자가, 동물원에 있어야 할 동물이, 흉기를 든 험한 자가 고개를 숙이지는 못할망정 제멋대로 구는 행태를 꾸짖는 마음과 분노가 활보에 스며들어 이제는 주홍글씨처럼 새겨졌어요. 제가 활보라면 참 억울할 것 같아요.


이처럼 중립적인 낱말이 부정적으로 굳어진 예는 활보만이 아닙니다. ‘배회’도 억울합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뜻의 ‘배회’가 마치 범죄 예비동작이나 치매 환자의 부적절한 보행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머리를 식히느라, 혹은 울적한 기분을 다스리느라 배회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수작(酬酌)’에는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작이 위계질서를 확인하고 관계를 다지는 예절의 범주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술과 함께 나쁜 일이 생기기도 했겠지요. 그래서인지 부정적 의미가 강해졌습니다. 수작질하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와 같이 속셈이 엿보이는 말이나 계획, 시비 거는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대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는 뜻의 ‘출몰’도 있습니다. 별도 출몰하고 간첩선도 출몰하지만 요즘은 주로 도심에 출몰한 멧돼지, 해수욕장에 백상아리 출몰과 같이 야생동물과 어울려서 쓰입니다. 거기에 더해 간혹 멧돼지가 출몰해 사살했다, 출몰한 멧돼지를 포획했다, 는 표현도 보여요. 수시로 출몰하던 멧돼지가 나타나서 그랬다면 모를까 출몰,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을 어떻게 사살하고 포획하나요? 출몰이 본래 뜻을 잃고 특정 대상(두려운 야생동물)이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잘못 쓰이는 예입니다.


‘변명’도 그래요.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해명하거나 구실을 내세운다는 중립적인 어휘지만 구차한 변명, 변명하지 마! 이런 말에서와 같이 핑계와 비슷하게 쓰이곤 합니다. 까닭이나 내용을 풀어서 밝힌다는 뜻의 ‘해명’도 변명이나 핑계로 보일 때가 있는데,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을 회피하려는 발언일 때가 많아서인 듯합니다.


우리는 매일 말하고 쓸 때마다 낱말을 선택합니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언어의 생존과 변화는 그런 반복에 달려 있어요. 어쩌다 보니 죄 없는 활보, 배회, 수작, 출몰, 변명이라는 낱말이 사건·사고 현장으로 끌려간 것 같습니다.


활보가 법정에 선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상상해 봅니다.


「활보: 제가 왜 사회에 위협이 된다는 건가요? 저는 씩씩하게 걸었을 뿐입니다.

언중: 변명하지 마시오.

활보: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해명입니다. 저는 넓게 걷는다는 뜻인데 어찌하여 나쁘게만 보시나요? 활보로 태어나 배회하듯 어슬렁거릴 수는 없잖아요.

언중: 활보가 허튼수작을 부리려는군. 더는 출몰하지 못하게 당장 활보를 가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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