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요.’
중급 2 ‘~조차’라는 문법 예시 문장 중 하나입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기억 대신 추억을 써도 되느냐고 물었어요. 사전을 찾아봤는데 뭐가 다른지 구별이 안 된다면서요. 요즘은 학생들이 번역기나 전자사전을 곧잘 쓰기에 이런 식의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 기억: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 추억: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옛 기억/추억이 떠오르다, 소중한 기억/추억을 간직하다. 어떤 일을 되살려 생각한다는 점에서 기억과 추억은 비슷하지요. 그런데 요점을 기억해 두세요, 기억력이 좋다, 추억에 잠기다, 추억 여행을 떠나다, 이런 문장에서 기억/추억을 맞바꿔보면 영 어색해요.
기억이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머리에 저장하는 거라면 추억에는 과거의 일을 되새기는 감성적인 느낌이 더해져요. 추억하고 싶지 않은 내용은 외면하려 하는 걸 봐도 추억은 대개 그리움의 정서와 함께하지요. 슬픈 추억이나 아픈 추억도 있어요.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볼 때 슬픔이나 아픔이 희석되었거나, 현재의 나에게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승화되었을 때 어울립니다. 예를 들어 첫사랑과의 이별이 당시에는 괴로웠더라도 돌이켜보니 아련하고 소중한 경우가 되겠지요. 부모의 임종과 같은 고통을 슬픈 추억이라고 하면 매우 어색한 이유입니다.
기억이 우리를 똑똑하게 만든다면, 감정과 경험이 녹아든 추억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듭니다. 치매 어르신이 자식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자식을 바라볼 때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기억이 먼저 희미해지고 감정 반응은 오래 남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합니다.
이러한 대비는 신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북유럽신화의 최고 신 오딘(Odin)은 어깨 위에 후긴과 무닌이라는 까마귀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닙니다. 미드가르드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는, 오딘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존재들입니다. 오딘은 후긴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무닌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더더욱 두려워합니다. 보통 후긴을 생각, 무닌을 기억이나 마음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저는 후긴을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기억(생각)’으로, 무닌을 ‘감정이 배어 있는 기억(추억)’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딘 역시 정보로서의 기억보다는 정서와 함께 누적된 추억을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문득 제가 가르친 학생들이 훗날 제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공부하고 웃었던 추억은 오래 간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과 추억 이야기를 하니 작가 김초엽의 단편 소설 ‘관내분실’이 떠오릅니다.
「표준형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수많은 개인들에 모두 들어맞지 않다 보니 한계는 있습니다. 입력 신호가 해당 마인드와 아주 유의미한 관계가 있어야 하죠. 예를 들어서, 돌아가신 분이 이런저런 바깥 활동을 자주 하셨으면 비교적 찾기가 쉽거든요. 개인을 고유하게 특정하는 물건이나 상황일수록요. 고인과 많이 연결된 것, 많은 기억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 검색에 필요합니다.」
관내분실된 엄마의 기록을 찾으려는 주인공 지민에게 연구원이 하는 말입니다. 소설 속 세상에서는 죽은 이들의 기억을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한 마인드가 도서관에 보관됩니다. 그런데 정보로서의 엄마(기억, 데이터)는 서버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그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인 인덱스가 사라졌어요. 검색을 위해서는 기억이 많이 얽혀 있는 것이 필요했죠. 소설 속 데이터가 차가운 정보의 집합체 후긴이라면, 지민이 마침내 찾아낸 엄마는 감정이 녹아든 무닌의 귀환 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