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한 끗 차이, ‘은/는’

by 괜찮은 작가 imkylim

초급 1 수업에서 날짜와 요일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한 학생이 교재에 있는 오늘은 5월 5일이에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 라는 문장을 가리키며 ‘오늘은/오늘이’, 뭐가 맞는 거냐고 물었어요. 둘 다 맞지만 초점이 다르지요. 오늘은 5월 5일에서는 5월 5일이라는 정보가 중요하고, 오늘이 5월 5일에서는 바로 오늘이라는 정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소개를 할 때 저는 ~입니다, 이렇게 하지요. ‘은/는’이 이야기의 판을 열기 때문이에요. 한편 ‘이/가’는 정보의 초점, 새로 알려줄 내용을 담습니다.


‘은/는/이/가’ 구분이 크게 의미 없을 때도 있어요. 서울은 수도예요./서울이 수도예요,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이 누구예요?, 날씨는 어때요?/날씨가 어때요? 와 같은 경우입니다. 오늘은 무슨 요일이에요?/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 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요. 맥락상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거든요.


하지만 차이가 있는 예도 있지요. 요일 어휘를 배우는 사람 A가 아직 요일 순서를 확실하게 익히지 못해서 질문하는 상황을 가정해 볼게요. A가 “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라고 물어보고 누군가가 답해 줍니다. 답변을 들은 A는 내일의 요일도 묻고 싶습니다. 이때 A는 “그럼 내일은 무슨 요일이에요?” 해야겠지요. 이와 같이 처음 말할 때는 ‘이/가’, 그 내용을 다시 말할 때는 ‘은/는’을 씁니다. 예를 들어 책이 있어요. 그 책은 친구가 준 거예요. 이렇게요.


‘은/는’을 넣으면 의미가 확연히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성격은 좋다, 노래는 잘한다’와 같은 예에서 보조사 ‘은/는’은 뒤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대조의 어감을 줍니다. 성격은 좋은데 공부를 못한다든지, 노래는 잘하지만 다른 건 못한다든지, 이렇게요. 만약 오늘은 예쁘다, 하면 굳이 넣은 ‘은’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어요. 돈은 필요해요,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에서는 강조의 의미고요. 또 지구는 둥글다, 와 같이 일반적인 진리나 상식을 말할 때도 ‘은/는’을 써요.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알아요.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은/는/이/가’를 더하거나 빼고 읽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았지요?”라는 문장을 “비행기는 시간에 늦지 않았지요?”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조사를 바로잡아 다시 읽으면 학생의 얼굴에 왜 다시 읽어주지? 하는 표정이 어릴 때도 있어요. 무심코 한 실수라서 본인이 잘못 읽은 줄도 모르는 거예요. 학생이 ‘는’을 넣어 읽는 바람에 문장의 초점을 사람에서 비행기로 옮겨 비행기가 제때 왔는지 묻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면 그제야 알았다는 듯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지요.


어쩌면 한국어에서는 조사가 종종 생략되기 때문에 더하거나 빼는 실수를 하는 것 같아요. 대화 중에 ‘너’가 누군지 확실하면 배고파? 왔어? 라고 해도 되고, ‘나’가 확실하면 머리 아파, 피곤해, 실수했어, 해도 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오늘 바빠, 나 갈게, 이거 좋아, 나 학교 간다, 기차 탔어, 밥 먹었어, 와 같이 화제와 맥락이 분명할 때 조사를 생략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조사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요. 밥은 먹었어, 밥도 먹었어, 밥만 먹었어, 밥을 먹었어, 밥으로 먹었어, 밥과 먹었어, 밥까지 먹었어, 밥마저 먹었어, 등 어떤 조사가 붙느냐에 따라 의미가 아예 달라집니다. 밥 이야기를 하니 영화 ‘살인의 추억’ 속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배우 송강호는 범인으로 보이는 자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말하지요. 생각에 따라 극악무도한 주제에 밥은 먹냐는 비아냥일 수도, 네가 정상이냐는 분노일 수도, 밥은 챙겨 먹으라는 인간적 연민일 수도 있습니다. ‘은’ 하나에도 이런 복잡미묘한 심리를 담을 수 있다는 게 참 흥미롭습니다.


가수 G-DRAGON의 ‘삐딱하게’는 연인이 떠난 후의 복잡한 심리를 담고 있어요.

♪ 오늘 밤은 삐딱하게 오늘 밤은 나를 위해 아무 말 말아줄래요. ♫

매일은 아니고, 바로 오늘 밤만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이의 마음을 더 흔들지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씨(조사) 하나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뜻인데 토씨가 틀려도 얼추 맞는다는 뜻으로도, 토씨가 정확함을 만든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저는 문득, 딱 맞는 토씨를 가려서 쓸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는 욕심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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