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당에 모심을 끝으로 장례 절차가 마무리될 줄 알았지...
글을 시작하기 전 정정할 내용이 있다. 우리가 흔하게 쓰는 '납골당'이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이다. 광복절을 맞아 일본식 표현은 우리말로 순화해서 써야지. 아버지가 해방둥이셨으니까 올해가 광복 78주년이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납골당이 아닌 봉안당(奉安堂)이라고 말하고 쓰자. 혹은 봉안당 외 봉안묘, 봉안탑, 봉안담 등을 포괄해 '봉안시설'이라 한다. 봉안당은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뼛가루)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전편에도 언급했지만, 생전 몇 년만 방안 신세를 졌을 뿐, 아버지는 갑갑한 것을 무척 싫어하셨던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유골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 고민이 컸다. 심지어 전 직장 주임이 시아버님 장례 후 장례식장의 지정된 장소에 뿌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충격을 받았지만, 이 방법도 심각하게 고민하며 장례식 내내 아버지 유골을 어떻게 모실지 결정 내리지 못했다.
예전에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산이나 강, 바다 등에 가서 유골을 뿌리는 장면이 꽤 많이 나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유골의 자연 방사는 불법이다. 심지어 반려견도 아무 곳에 뭍을 수 없다.
장례 방법
1. 매장 : 요즘은 80%가 화장한다. 현대에 들어서 매장은 자손들에게 신경 쓸 거리가 많은 장례 문화가 되었다. 때마다 벌초를 해야 하고, 장마철에는 산사태로 혹여 봉분이 무너질까 걱정 하는 등, 특별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선산'같은 문화가 있지 않는 한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2. 화장 : 양재추모공원, 인천승화원 등 정해진 곳에서 시신을 불로 태우는 장례 방식이다. 요즘은 사후 시신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장례식이 말이 3일이지 2박 3일이면 끝나는 일정이라서 마치 산사람을 태우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아무튼, 요즘 가장 대중화된 장례 방법이다.
화장 후 유골 모시는 방법
1. 봉안당 : 유골을 봉안함에 넣고, '추모공원', '추모관' 등의 이름을 가진 곳에 모시는 것을 말한다. 자리, 층수, 봉안당의 유명세 등에 따라서 봉안당 사용비와 관리비는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눈높이에 있는 자리가 가장 비싸다.
2. 수목장 : 수목장으로 허가받은 곳에서 나무를 분양받아 유골을 모시는 방법. 자연친화적인 느낌이 있으나 가격대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3. 바다장 :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방법.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특정 지점에서 유골을 바닷물에 뿌린다. 단, 드라마처럼 손으로 유골을 뿌리는 것이 아닌 특수한 기계를 동원해 유골을 바닷물 속으로 통째로 넣더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를 돕던 여자가 남편이 사망하자, 바다장을 진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현재 바다장을 진행하는 업체도 몇 곳 있다. 관심 있다면 알아서들 검색하세요.
4. 화장터에서 바로 뿌리는 방법 : 유골을 아무 곳에나 뿌렸다가는 법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화장터마다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하는데, 직접 가보진 못했다. 볼 일도 없었고. 그런 장소가 얼마나 넒은지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많은 신원미상자 또는 기타 등등의 사유로 앞서 나열한 방법으로 모시지 못한 분들의 유골이 모여 있을까. 이런 이야기로 조문 온 지인들은 한사코 이 방법을 말렸다.
조문을 온 오빠 지인 덕분에 인천 만월산에 위치한 약사사 미타전 봉안당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화장을 마치고, 봉안함에 모신 아버지는 오빠 옆자리에, 그리고 아버지 영정 사진은 내 옆자리에 모시고, 행여 떨어질까 봐 안전벨트도 맸다.
약사사는 인천지하철 간석 오거리와 근접해 교통 접근성은 좋으나 근방에 가정집이 많았고, 골목길도 좁아 버스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안 됐다. 그래서 우리는 인천승화원에 버스를 주차하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약사사 직원이 몰고 온 작은 승합차로 옮겨 타 봉안당으로 가야 했다.
인천승화원도 매우 드넓었다. 양재추모공원이 아름다운 조경에 둘러싸인 '화장터 같지 않은' 세련되고 도시적인 장소였다면, 이곳은 경건함이 느껴지는 장례시설이더만. 거추장스러운 조경 없이 심플한 추모관과 외부에 비석들도 엄청나게 많아서 마치 현충원에 온 느낌까지 들었다. 찰나의 순간, 인천승화원을 둘러본 뒤, 바로 승합차에 올랐다. 이때는 버스 기사와 장례지도사의 휴식 시간이었겠지. 다시 인천승화원으로 돌아와 고대구로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장례 일정의 끝이라는 장례지도사의 설명이 있었다.
미타사를 가니, 대기하고 있던 중년쯤 돼 보이는 상조회사 여직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빠와 여직원 그리고 봉안당 직원, 따로 차를 몰고 미리 절에 계셨던 큰 외삼촌과 함께 아버지를 모실 봉안당 자리를 골랐다. 그리고 세 사람은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내고 온 뒤, 다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안치실로 모였다.
좋은 자리는 당연히 계약금이 비싸다. 마음은 눈높이에 해당하는 곳에 모시고 싶었지만, 우리는 모두 아버지 죄송해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좋은 자리로 옮겨드릴게요라고 말하며 1층 자리를 잡았다. 최초에는 봉안당 계약금과 일 년 치 관리비를 한꺼번에 지불해야 한다. 돈 생각 하지 않고 모시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속상했다. 49재 비용까지 고려하면 우리의 최선이었다.
미타전에 모신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리고, 아버지의 봉안함을 상자에서 꺼내 안치실에 넣는다. 다른 유족들의 봉안함 주변은 정말 예쁘게들 꾸며 놓았더라. 작고 좁은 자리마다 마치 소꿉장난 같은 소품부터 가족사진까지... 나중에 다른 유족들에게 물어보니 봉안당 용으로 넣는 사진을 제작해 주는 인터넷 사이트도 있다고 들었다. 유족들의 성의가 대단했고, 장례 산업이 이렇게 무한한지 깨달았던 순간이다.
이제, 나무 상자에서 아버지의 봉안함을 오빠가 꺼냈다.
오빠 : "아직도 따뜻해'
나 : "나도 만져볼래!"
온기가 남아 있는 아버지의 봉안함. 너무 예뻐서 슬프기까지 하다. 안치실에 넣기 전, 당연히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봉안함만 달랑 넣는 게 허전해 보이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늘 어머니가 챙겨주시던, 절에 가면 무료로 나눠주는 신용카드 크기 만한 작은 '수월관음도'가 떠올랐다.
그런데 '관음도'라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 : 엄마, 그.. 상?! 상!
장례 일정으로 지친 어머니가 잠시 머뭇거린다. 아, 이래서 피를 나눈 가족인가? 큰 외삼촌이 내가 무얼 원하는지 눈치채고 지갑을 꺼내며 이야기하신다.
"큰 외삼촌 : 내가 있어. 내 거 줄게."
"나 : 아니예요. 삼촌, 그냥 갖고 계세요. 엄마가 많이 있을 거예요."
그때서야 어머니가 내 말뜻을 알아들으셨는지 상복 안에 입은 점퍼 속에서 주섬주섬 관음도 두 장을 꺼낸다. 옆에서 큰 외삼촌이 놀리신다. "누나는 뭔 옷을 그렇게 껴 입으신 거야..."
아버지 봉안함 앞에 관음도 두 장을 세워 놓으니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어머니도 좋아하셨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걸 놓을 생각을 했냐면서. 그냥 종교적 믿음이다. 왠지 관세음보살님께서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 지켜주실 것 같았다.
이후, 봉안당 직원이 유리로 된 문을 단단히 고정하고,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뒤로하며 미타전 문을 나섰다. 오전부터 이어진 일정을 함께 한 큰 외삼촌은 작별을 고하며 가셨고, 우리는 다시 승합차를 타고 인천승화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우리 가족은 허탈한 마음으로 고대구로병원으로 이동한다. 병원에 인접해지자 장례지도사 역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장례지도사 : 이제 장례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유족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
우리 역시 매 순간 경건하고 진심으로 격식있게 장례식을 진행해 준 그분에게 연거푸 감사 인사를 드렸다.
좋은 사람이지만... 또 만나고 싶은 사람 아니, 직업군은 아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 세 사람은 밖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집에 들어왔다. 3일 밤낮을 홀로 지낸 강아지 '보리'는 얼마나 짖었는지 목이 다 쉬어서 짖지도 못한다. 빌어먹을 옆집. 초상치르고 오니까 좀 조용히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고 갔는데 신났었구먼. 하긴, 그들에겐 남의 일이지.
앰뷸런스에 실려가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시고 영정 사진만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내일은 영정 사진을 갖고 절에서 진행하는 초제(삼우제로 알려진 첫제사)를 지내러 가야 한다. 그리고 49일 동안 7일에 한 번, 7번의 제사를 지낸다. 불교의 장례 의식은 산 사람에게 힘든 일이지만, 개인마다 가진 종교적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5제와 마지막 7제(49제)는 대중제로 모시기로 했다. 역시 각자의 선택일 뿐, 강요는 없다. 그냥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지만 쓰지 못했고, 반대로 생각나지 않아서 쓰지 못한 아버지의 장례식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례식 내내 장례지도사들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을 어떻게 마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매우 의문스럽다.
일 년이 지난 현재 기억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몇몇 장면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 좋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까요? 아니면... 윤회 사상에 따라 평생 봉사를 했고, 궂은 일에 몸 사리지 않은 복을 받아 다음 생은 이생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셨을까요?
보고 싶어요. 아빠.
P.S : 불교식 장례 의식에 관해서는 나중에 정리가 되면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서 없이 긴 연재를 읽어 주시고 고맙게 라이킷까지 꾹꾹 눌러주신 동료 작가님들, 한분 한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