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만히, 지금에 머무는 기쁨
사람은 동물처럼 편히 쉬지 못한다. 머리에선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고, 손에서는 핸드폰을 놓지 못한다. 스케줄을 채우며 안심하고, 쉼이 길어지면 불안과 자책으로 자신을 옭아맨다. 보는 이마저 피로해진다. 한편 산책길에 만난 백로와 왜가리는 일상의 몸짓 하나하나가 눈길을 끈다. 큰 날갯짓으로 솟아오르는 모습뿐만 아니라 멈추어 선채 햇살과 바람을 느끼거나 무언가에 집중한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맹수일지라도 자기만의 세계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다면 그 편안함 속에 함께 머물고 싶어진다.
선반 위에 개는 반쯤 눈이 감긴 채 웅크려 쉬고 있다. 그 옆에는 토기 주전자와 나뭇가지 뭉치, 버들 바구니와 슬리퍼 한 짝도 놓여있다. 더깨가 앉은 반질반질한 적갈색 토기와 이끼 낀 나뭇가지의 거친 껍질, 촘촘하게 엮인 바구니와 가죽을 덧댄 나막신까지, 각 사물의 형태와 질감은 만져질 듯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물론 이 정물보다 눈길을 끄는 주인공은 살아있는 개다. 둥글게 웅크린 몸의 굴곡을 따라 자란 부드러운 하얀 털, 축 쳐진 귀와 촉촉한 코, 가죽 같은 발바닥까지, 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다. 누구라도 그림 앞에 서면 손을 뻗어 쓰다듬고 싶을 것이다.
이 작고 놀라운 그림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 헤리트 다우(Gerrit Dou, 1613~1675)의 작품이다. 다우는 유리 장인의 아들로 태어나 십 대에 레이덴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화실에 들어가 실력을 쌓았다. 렘브란트는 곧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최고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누렸고, 다우도 서서히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레이덴 최고의 화가로 성장한다. 다우는 주로 친밀하고 편안한 가정 풍속화를 그렸고, 정교하고 생생한 질감 표현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얇은 유약을 여러 겹 바르는 기법으로 빛을 투과 혹은 반사시켜 그 광채와 질감을 정교하게 구축했다. 게다가 보통 화가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여 공들여 작업했기 때문에 다우의 작품은 월등히 높은 가격을 받았다.
그림의 주인공인 작은 개는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렘브란트는 일상이나 성서를 다룬 장면에 종종 개를 등장시켜 재미를 더했는데, 몸을 공처럼 웅크린 <잠자는 강아지>와 포즈가 유사하다. 손바닥보다 작은 이 판화는 강아지만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인 데다, 곤히 잠든 강아지를 화면에 밀착해 제시해 무척 친밀하게 느껴진다. 선만으로 광택이 도는 강아지의 털과 잠의 포근함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게 담아낼 수 있을까. 슬쩍 다가가 기대어 잠들고 싶을 정도다.
다우의 그림으로 돌아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뚜껑이 깨진 항아리와 가장자리가 풀린 바구니는 오래 사용한 듯 하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물건이다. 장작으로 쓸 자작나무 뭉치도 놓여 있어 이곳이 부엌 저장고나 창고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낡은 물건이 등장하는 그림이 집에 걸려 있으면 한편으로 주인의 검소함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슬리퍼는 왜 한쪽만 놓여 있는 것일까. 반려견이 있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을 텐데, 개가 자기만의 아지트로 슬러퍼를 가져와 물고 뜯으며 놀다가 그만 지쳐버린 것일까. 피곤한 개는 시원한 토기에 기대 쉬다가 곧 잠들 참이다. 어쩌면 항아리 뚜껑을 깨거나 바구니를 뜯은 것도 녀석의 소행일지 모른다. 정물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개가 등장하는 이 그림은 더 친근하고 흥미로운 매력으로 보는 이를 머물게 한다.
프란츠 마르크의 <눈 속의 강아지>는 추운 눈밭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화가의 양치기 반려견인 셰퍼드 믹스견 루시다. 루시는 정밀하게 묘사된 다우의 강아지와 다르게 형상이 돌산처럼 단순화되었고 색조도 색다르다. 하얀 눈과 파랑 흔적에서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지만, 노랑과 연둣빛을 발하는 강아지는 생명의 온기와 활기를 내뿜는다. 루시는 뒤쪽 초록 자연과 공명하면서 아래 분홍빛 그림자가 어른거려 더욱 생기롭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는 뮌헨에서 풍경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동물 그림으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년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다 결국 미술로 전향했다. 20세기초 독일이 근대화로 급변하던 시기에 마르크는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특히 동물에게서 영적인 순수함을 발견해 동물원에서 다양한 동물을 열정적으로 연구했다. 1911년 마르크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청기사파'를 설립하며, 색채의 본성과 효과, 상징성에 더욱 주목했다. 파리 여행에서 접한 입체파와 야수파, 미래파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영향으로 형상은 더욱 추상화되고 색은 강렬해진다. 강아지의 노란색은 마르크에게 여성적이고 온화하며 즐겁고 관능적인 특성을 품게 되었고, 영적이고 지적이며 남성적인 파란색과 대비를 이룬다.
1910년대 마르크의 그림 속에는 말과 소, 사슴, 늑대와 여우 등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범신론적인 시각을 가진 마르크는 각 동물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고, 그들의 영혼을 새로운 몸짓과 색채로 표현했다. 인간이 바라보는 동물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동물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자신들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눈 속의 강아지>는 겨울의 자연 속에서 누리는 안식과 고요를 전한다. 마르크는 동물의 순수하고 평화로운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동물이 바닥에서 쉬거나 잠자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안타깝게도 마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불과 36세의 나이로 전사했고, 인간의 잔혹과 광기를 경험한 이들에게 그의 동물 그림은 더 큰 울림을 주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가 반려견을 담아낸 수백여 점에 작품을 보면 개가 얼마나 다양한 모양새로 쉬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1987년에 입양한 닥스훈트 한 쌍 스탠리와 부지는 곧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청년 때 영국을 떠나 이십여 년을 보낸 캘리포니아에서 친구들이 하나둘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던 시기에 호크니는 반려견들로부터 큰 위안을 받았다. 호크니가 본격적으로 스탠리와 부지를 그린 것은 절친 큐레이터 헨리 겔트잘러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호크니는 개들과 함께 1995년 말리부로 떠난다.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사랑하는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길 원했고, 어느 순간 스탠리와 부지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크니는 이 친구들이 먹고 자고 장난치고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몸짓과 표정, 눈빛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다른 개성도 발견했다. 스탠리는 호크니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애교쟁이였고, 부지는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호크니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개들 또한 사람처럼 칭얼대거나 지루해하기도 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개들은 좋은 모델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머무는 순간이 오면 바로 붓을 들 수 있도록 호크니는 여기저기 캔버스와 물감을 준비에 놓았다. 연작 '개들의 나날들'(1995)을 구성하는 40여 점의 유화에서 이들은 주로 소파나 쿠션 위에서 느긋하게 쉬거나 자고 있다. 홀로 혹은 둘이 함께 만들어내는 편안하고 아늑한 형태는 호크니에게도 평온과 기쁨을 선사했다. 몰입해 30여 분 만에 완성한 그림들은 그만의 개성과 재빠른 붓질, 두 친구에 대한 그의 애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평생 가까운 친구들의 초상을 다양한 매체로 그리며 그 변화와 관계를 보여주었듯이, 스탠리와 부지도 여러 판화 기법으로 재현되었다. 그 가운데 15점의 에칭으로 구성된 연작 '개 벽'(1998)은 밝은 색감의 유화와는 다르게 다양한 해칭이 자아내는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이다. 2000년대 스탠리와 부기는 세상을 떠났지만, 함께한 수많은 순간들을 담아낸 그림들 속에서 그들은 곧 일어나 짖을 듯 생생하다. 호크니는 개들의 초상을 기록하면서 가장 단순한 일상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멈추어 온전히 쉬는 모습은 호크니의 손을 바쁘게 만들었지만, 그 무엇보다 큰 위안과 휴식을 선사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thedavidhockneyfoundation.org/chronology/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