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입, 일상에서 맛보는 천국
그야말로 집중력을 도둑맞은 시대에 살고 있다. 집에서나 지하철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모두가 핸드폰만 응시하는 모습에 가끔 섬뜩할 때가 있다. 우리가 빠져있는 것은 타인의 모습과 그들이 만든 세계. 무언가에 몰두해 있지만 그 모습은 매력이 없다. 반면 놀이나 운동, 노동이나 창조에 온전히 몰입한 몸짓은 때때로 우리를 매혹하고 한동안 눈길을 머물게 만든다. 열중한 자가 느끼는 무아(無我)의 상태, 그 만족과 평온이 전해진다. 마치 샤르댕 그림 속의 아이들처럼.
탁자 앞에 선 소년이 카드로 집을 짓고 있다. 팔뚝을 올리고 몸을 살짝 기울인 채, 다음 카드를 손에 쥐고 고민한다. 어떻게 더 높이 쌓을 수 있을까. 몇 번의 실패 후에 손길은 더욱 신중해졌을 것이다. 발그레한 볼은 소년이 얼마나 열중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탁자에 놓인 카드와 동전, 칩 같은 것은 앞에 열린 서랍에서 꺼냈을 것이다. 앳된 소년의 어른스러운 패션도 시선을 끈다. 18세기 파리에서 유행했던 프록코트에 삼각모자, 리본을 맨 긴 머리와 양 옆에 곱슬머리까지, 세심한 보살핌을 받은 넉넉한 집안의 아이일 것이다. 이 작품은 샤르댕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구 장인이었던 장 자크 르누아르가 의뢰한 아들의 초상이다.
장-시메옹 샤르댕(Jean-Siméon Chardin, 1699~1779)은 귀족들의 사교 문화와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이 만개하던 시기에 파리의 가구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샤르댕은 두 역사화가 밑에서 그림의 기초를 배웠지만, 당시 미술계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정물화를 자신의 분야로 선택했다. 게다가 그가 소재로 삼은 것은 화려한 식기나 진귀한 음식이 아닌, 오래된 냄비와 도기, 사냥감과 생선, 파 등의 소박한 부엌살림과 식재료였다. 갈색조의 어두운 배경에 부드러운 빛 속에서 드러나는 대상의 풍부하고 생생한 질감, 균형 잡힌 구도, 조화로운 형태와 색채는 평범한 사물에 한 꺼풀 마법을 덧입혀 감식가들을 하나둘 매혹했다. 결국 샤르댕은 1728년 ‘동물과 과일에 재능이 있는 화가'로 인정받으며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173,40년대 샤르댕은 부르주아 가정의 일상을 담은 장르화(풍속화)에 도전했다. 부엌 하녀가 재료를 다듬거나 음식을 준비하고, 유모는 아이를 준비시키거나 식사 기도 드린다. 부인은 홀로 차를 즐기고, 아이들은 이런저런 놀이에 빠져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순간은 그의 정물화처럼 미화되지 않고 담담하게 묘사되었다. 샤르댕은 1731년 결혼해 아들과 딸이 태어나며 가족을 이루었지만, 1735년에 아내가, 몇 년 후 딸이 세상을 떠나는 상실을 겪었다. 일련의 변화는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이끌었고, 하녀와 유모가 돌보는 가정환경은 화가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다. 이 시기 남다른 시선과 애정으로 담아낸 아이들 그림은 특히나 탁월하다.
<비눗방울을 부는 소년>을 보자. 창틀에 두 손을 포갠 채 소년은 조심스럽게 빨대로 비눗방울을 불고 있다. 뒤에는 동생처럼 보이는 작은 아이가 이를 지켜본다. 샤르댕이 즐겨 그린 아이들의 놀이는 16,7세기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런 그림들은 경구가 더해진 판화로 제작되며 교훈이 강조되었다. 카드나 비눗방울, 팽이 놀이나 모티브는 삶의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본질을 암시하며 바니타스(vanitas)의 메시지를 전했다. 소년의 얼굴만큼 커진 비눗방울은 곧 터질 것이다. 두툼한 손, 작고 뜯어진 옷은 소년이 장성하고 있으며 이런 놀이를 즐길 아동기도 금세 지나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비눗방울은 또한 우리네 삶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그럼에도 놀이에 열중한 소년의 모습은 어쩌면 헛되기에 더 아름답고 소중해 보인다. 오후의 햇살은 오래된 석조 건물과 쑥쑥 자라는 담쟁이, 소년의 이마와 손등, 곧 사라질 투명한 비눗방울에서 반짝인다.
부르주아의 가정생활과 아이들의 놀이를 담아낸 샤르댕의 장르화는 인기를 끌어 여러 점으로 변주되었다. 귀족들의 향락과 사치와 감각의 무대를 장식하는 로코코 양식이 번성하던 시대, 샤르댕의 그림은 보다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갈망한 부르주아의 세계를 대변했다. 당대 사상가 드니 디드로(1713~84)는 샤르댕을 '위대한 마법사'라 칭하며 그의 진실성과 소박한 시적 감성을 칭송했다. 19세기말 샤르댕이 재조명되면서 그의 작품에 감명을 받은 마르셀 프루스트는 평범한 사물과 소소한 일상에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미학을 따라 자기 삶을 반추하며 유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27)를 쓰게 되었다.
샤르댕이 카드놀이를 그린 네 점 가운데 위의 첫 번째 작품(1735)은 마지막에 그린 대표작(1740-1)과 구성이 흡사하나 배경과 소품이 더 복잡하다. 소년은 초록 펠트가 깔린 (아마도 게임을 위한) 책상에서 카드로 만든 집의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탁자와 서랍에 카드들은 다양하고, 패를 알 수 없는 뒷면도 여럿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기에 카드는 삶의 우연성을, 훅하고 불면 무너질듯한 카드집은 노력의 덧없고 연약한 본질을 암시한다. 미완성된 1층집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 그림을 판화로 제작한 경구에는 어른들이 소년을 비웃는 것은 잘못이며, 어른들의 계획도 어리석고 허황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판화에 따라 그 의미나 교훈은 변형되거나 자의적인 내용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1737년에 그린 <카드로 만든 집>은 <라켓을 든 소녀>와 쌍으로 제작되어 더욱 흥미롭다. 똑같은 책상에서 소년은 이전과는 다르게 세로로 접은 카드를 세워 집을 만들고 있다. 세로형에 클로즈업되어 시선은 더욱 소년에게 집중된다. 한편 라켓과 셔틀콕을 든 소녀는 한 손을 의자 기둥에 올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상기된 뺨과 어깨에 떨어진 하얀 분은 소녀가 막 (배드민턴의 초기 형태인) 셔틀콕을 치고 돌아왔음을 알려준다. 타이트한 상의에 풍성한 페티코트로 부풀린 치마는 운동하기에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파란 허리끈에 달린 작은 재봉 가위와 바늘꽂이는 가정에서 소녀의 역할을 암시한다. 여성의 활동 반경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집 밖에서 셔틀콕 게임을 즐긴 소녀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한 소녀는 이제 실내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 같다.
샤르댕은 점차 단순하고 조화로운 구성을 시도했는데, <팽이를 돌리는 소년>은 대표작과 유사한 구성이다. 귀여운 아이가 푹 빠져 있는 것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팽이. 작은 책상에 책과 종이, 깃펜이 꽂힌 잉크병이 밀려나 있고, 열린 서랍에는 드로잉펜이 빼꼼히 나와있다. 해야 할 공부나 숙제를 암시하는 것일까. 그런데 소년의 관심은 온통 작은 나무 팽이에 꽂혀 있다. 곡예하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팽이는 이제 세상의 중심이다. 비록 일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일 테지만, 성공적인 손짓으로 아이는 세상을 색다르게 감각한다. 아이의 얼굴엔 고요하면서도 뿌듯한 미소가 번진다. 말끔한 차림새에 하얀 분으로 머리를 단장한 소년은 보석상 샤를 고드프루아의 아들로, 돌아가는 팽이처럼 보는 이를 매혹한다.
물론 전통에 따라 <팽이를 돌리는 소년>에서도 교훈을 읽을 수도 있다. 짧고 덧없는 즐거움에 현혹되어 중요한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하지만 아이만의 세계에서 그저 놀이에 몰두한 모습이 너무나 반짝이기에 훈계는 힘을 잃는다. 이전에 누구도 이처럼 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에 주목하면서 세심한 관찰과 공감으로 아이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낸 화가는 없었다. 그래서 샤르댕은 개별 아동의 진정한 초상을 그린 최초의 화가로 여겨진다. 18세기에 들어서야 아동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고, 아동기와 교육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계몽주의 흐름과도 조응한다. 놀이에 열중한 저 소년을 보면 "그냥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 두어라"라 말했던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호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가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습니까? 색을 사용하는 것이지, 감정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아이를 중심으로 단순하고 세심하게 배치된 대표작으로 돌아와 보면, 이제 왜 가장 우아한 집중력을 발휘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무 무늬 없는 갈색조의 벽, 사용감이 있는 잘 만들어진 탁자, 소년과 탁자와 카드가 만들어내는 안정된 삼각형 구도, 단정하고 깨끗한 차림의 소년, 순간에 집중한 마음과 생각, 그 분위기를 전하는 공기와 미세한 빛까지. 드라마나 알레고리, 교훈은 희미해지고, 있는 그대로의 일상과 물건을 그저 바라보고 음미하게 한다. 소년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집 짓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다. 아이는 이런 놀이속에서 창의력을 발전시키고, 실망과 성취감을 느끼며, 집중과 인내를 배울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자주 느낀다면, 천국은 아이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