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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Nov 12. 2023

7-4. 모세_계약과 화해의 중재자

: 시나이 계약, 율법의 서판과 금송아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 두 달의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닌 시나이산이었다.

시나이산에 올라간 모세는 십계명과 몇 가지 율법을 받고 내려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약을 중재한다. 두 번째 등반에서 모세는 40일 동안 하느님과 지내며 성막과 제사에 대한 율법을 들었고, 하느님이 기록한 두 증언판을 받는다. 한편 기다림에 지친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신들을 이끌 신상을 만들자고 청한다. 아론은 이들이 가진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백성들은 경배하며 축제를 벌였다. 내려와 이 광경을 목격한 모세는 격분해 증언판을 내던진다. 모세는 금송아지도 파괴하고 이 일로 진노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한다. 돌판을 만들어 다시 산에 올라간 모세는 하느님과 40일을 머물며 십계명을 판에 기록해 가지고 내려온다. 그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놀란다.   

 

코시모 로셀리, <시나이산에서 내려온 모세>, 1481-2년, 프레스코, 350 x 572cm,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의 한쪽 벽을 장식한 코시모 로셀리(Cosimo Rosselli, 1439~1507)의 프레스코화는 율법을 받는 모세의 여정을 보여준다. 시나이산 꼭대기에 하느님에게 율법을 받는 모세가, 중턱에는 기다리는 여호수아가 보인다. 오른편에는 제단 위 금송아지에 경배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묘사되었고, 중앙에 내려온 모세가 증언판을 내던지려고 한다. 왼쪽에는 이후 새로운 증언판을 받은 모세가 내려오자 사람들이 그 광채에 놀라 두려워한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하느님의 손이 율법을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모세에게 건네는 장면을 주로 묘사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우상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에 십계명판을 내던지는 모세로 옮겨가며 미술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경우에 따라 로셀리의 작품처럼 여러 시점이 한 화면에 표현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 율리우스 2세의 묘소 중 <모세>, 1515-16년, 대리석, 높이 2.35cm,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로마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한 작품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지를 위해 조각한 모세일 것이다. 80세의 모세는 근육질의 다부진 몸과 지혜와 연륜을 암시하는 긴 수염을 가졌다. 머리에 난 뿔, 일그러진 얼굴과 불타오르는 눈, 팔다리 근육에 선 핏줄까지, 곧 폭발할 듯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 이미지를 보면) 그는 증언판을 옆에 낀 채 앉아있지만 당장에라도 일어날 태세다. 그 모습은 하느님이 느낀 배신감과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관람자는 모세가 주시하는 곳에서 펼쳐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를 상상하게 된다.    


모세의 머리에는 왜 뿔이 나 있을까. 화가 난 모세가 증언판을 부수고 다시 시나이산에 올라 40일을 지내며 새로운 증언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 났다는 것을 발음이 유사한 ‘뿔’로 오역한 것이 미술에도 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보통 뿔이 나있거나 뿔모양의 광채를 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라파엘로 산치오, <율리우스 2세의 초상>, 1511-2년/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의 묘소, 1505-45년 / 모세상 세부


묘의 주인인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 재위 1503~13)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초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교회의 권력 강화를 위해 힘썼고 최고의 예술가들을 동원해 로마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하게 하였고(물론 성당은 이백여 년에 걸쳐 여러 건축가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 궁전 내 서명의 방(1508~11)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게 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자신의 묘소 조각을 맡겼으나 재정 부족으로 프로젝트를 중단했고, 대신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1508~1512)를 그리게 했다.


율리우스 2세 사후에 계획이 변경, 축소되며 40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는 미켈란젤로에게 재앙에 가까웠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설치된 묘소 조각의 주인공은 단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머니 라헬과 레아 사이에 위치한 모세다. 성당 입구 쪽을 바라보는 모세상은 더 크고 돌출된 데다가 집중된 조명으로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화들짝 놀라게 한다. 모세 위쪽에 옆으로 누운 율리우스 2세의 조각상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이자 율법의 기록자였던 모세와 연결시켜 교황의 권위를 드높인다. 하지만 실상 그는 성직매매를 통해 교황의 자리에 오른 가장 타락한 교황 중 하나였고, 미켈란젤로와의 사이도 원만치 않았다. 흥미롭게도 모세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와 흡사하다. 그래서인지 신앙심이 두터운 미켈란젤로의 열망을 시각화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니콜라 푸생, <금송아지 경배>, 1633-4년, 캔버스에 유채, 153.4 x 211.8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에 경배하며 축제를 벌이는 광경을 그렸다.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꽃으로 장식된 제단 위에 놓인 금송아지다. 성경의 금송아지는 황소로 묘사되었는데, 이집트에서 힘과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되던 황소신 아피스(Apis)를 연상시킨다. 제단 둘레에는 여러 남녀가 둥글게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흰색 튜닉을 입은 아론과 오른쪽 무리의 사람들은 금송아지에 경배하며 외친다.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출 32, 4) 텐트가 있는 뒤쪽에서도 사람들이 두 팔을 들고 다가온다. 이렇게 흥청거리며 노는 것은 이방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에서 행해지던 것이다. 이제 시선은 왼쪽 산중턱에 있는 모세와 후계자인 여호수아로 향한다. 바닥에는 벌써 석판이 부서져 있고, 모세는 번쩍 든 증언판도 깨트릴 참이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푸생의 그림은 다소 따분해 보이지만 프랑스 아카데미의 모범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푸생은 파리에서 르네상스 작품들을 접하고 고전고대를 동경하다 1624년 로마로 가 평생 그곳에서 활동했다. 주로 신화와 성경, 역사를 주제로 다루었고, 로마의 교양 있는 지식인들이 그를 후원했다. 이 그림에서 고대 조각상 같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다양한 움직임은 우아하고 조화롭다. 색채도 번갈아 사용된 데다가 균형 있는 구성은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삭막한 풍경과 하늘을 덮은 먹구름은 다가올 신의 분노를 암시한다.  



렘브란트 반 레인, <십계판을 든 모세>, 1659년, 캔버스에 유채, 136.5 ×168.5 cm, 베를린 국립 회화관


많은 화가들이 십계명판을 부수는 모세를 그렸는데,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모세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발산한다. 배경은 어딘지를 알 수 없는 혼돈의 공간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모세는 높이 든 증언판을 막 땅에 내리치려고 한다. 화가들은 보통 그의 분노를 표현했지만, 렘브란트의 모세는 얼굴에 슬픔과 비통함이 가득 차 있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여정에서 하느님의 이끄심과 기적을 체험했던 백성들이 금세 그것을 잊고, 신상 숭배가 일반적인 당대의 문화에 따라 보이는 상을 제작한 것이다. 사실 이후 모세는 금송아지를 빻아 물에 넣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고 레위인들에게 자기 형제와 이웃을 죽이게 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분노가 아닌 자애의 언어로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성서화를 그릴 때 이처럼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황을 깊이 고민해 행간의 의미를 반영하곤 했다. 후기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세부를 생략하고 표현적인 붓질을 사용해 배경을 추상화한 것이 주인공의 감정을 더욱 애잔하게 전달한다.


필리프 드 샹파뉴, <율법의 서판을 든 모세>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92 x 75cm, 에르미타슈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반면 하느님께서 손수 판에 새기신 십계명은 히브리어로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이전에는 보통 숫자나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십계명이 표현되었는데, 17세기가 되면 히브리어나 지역의 언어로 명시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한 예로 프랑스의 화가 필립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 1602~1674)가 그린 모세는 불어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들고 있다. 자선 병원을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읽고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렘브란트가 가톨릭 교회의 표준 성경인 라틴어 불가타(Vulgata)가 아닌 히브리어를 사용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 원전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반영한다. 게다가 말년에 유대인 지식인들과 교류했던 렘브란트가 히브리어에 대한 자문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아래 렘브란트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과 크기와 색채, 구성이 유사해 쌍으로 제작된 것으로 논의된다.

https://brunch.co.kr/@imlostinart/20



대조적인 언어로 묘사된,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구스타브 도레의 성경 삽화와 동화 같은 마르크 샤갈의 삽화도 감상해 보시길.


구스타브 도레의 성경 삽화, <모세가 십계명판을 부수다>, <시나이산에서 내려오는 모세>, 1866년, 에칭


마르크 샤갈의 성경 삽화, <모세가 증언판을 받다>, <금송아지>, <모세가 증언판을 부수다>, 1956년경, 에칭, 각각 28.4 x 2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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