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루소의 '퐁텐블로 숲의 나무'

: 생동하는 숲의 위대한 주인공

by 권연희

풍경화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바르비종파와 인상파로 이어지며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그 시작을 이끈 테오도르 루소는 장 프랑수아 밀레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최근 전시를 통해 재평가되고 있다. 자연을 열렬히 사랑한 이 도시인은 결국 숲으로 이주해 야생의 자연을 연구하며 나무들의 고유한 '초상'을 그렸다. 루소의 청원으로 벌목과 관광으로 파괴되어 가는 숲에 세계 최초의 자연보존구역이 지정되기도 했다.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숲은 루소의 뮤즈이자 작업실이었고 안식처였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의 나무>, 1840년대, 캔버스로 덧댄 종이에 유채, 40.4 x 54.2cm,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런던


묵직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작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잔뜩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구불구불 뻗어 나간 가지와 풍성한 잎을 가진 나무는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우람한 모습과 단단한 목질의 참나무는 전통적으로 강인한 힘과 인내, 풍요를 상징한다. 살롱전에 연이어 낙방한 30대 루소가 퐁텐블로 숲에서 그린 이 나무는 뚝심 있는 그의 모습을 닮았다. 주류인 아카데미와 전통에 순응하기보다 변방에서 자연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간 화가 주변으로 동료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넉넉한 그늘 아래서 인상주의도 탄생하게 된다.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는 풍경화가인 백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루소는 소년 시절 아버지의 고향인 프랑슈콩테에 머무르며 웅대한 쥐라산맥에 매료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소년은 숲에 대한 사랑으로 풍경화가를 꿈꾸었다.


당시 미술 아카데미에서 풍경화는 역사화나 초상화에 비해 저급한 장르로 여겨졌다. 화가들은 17세기 프랑스의 대가 니콜라 푸생(1594~1665)이나 클로드 로랭(1600~1682)을 따라 신과 영웅의 이야기가 있는 고전주의 풍경화나 목가적인 풍경화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루소도 아카데미 화가의 화실에서 그런 ‘역사적 풍경화’를 배웠지만, 상상의 풍경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묘사한 작품에 이끌렸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풍경화를 연구했고, 때마침 살롱에 소개된 영국의 존 컨스터블(1776~1836)의 소박한 시골 풍경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루소는 신화나 성경의 배경이 아닌 직접 마주한 살아있는 자연그리겠다는 열망을 키워나갔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의 나무와 바위 연구>, 1829년, 캔버스에 유채, 53.5 x 70.3cm,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1829년 청년 루소는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가 주어지는 로마상에 도전했다가 탈락했다. 대신 그는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자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해 퐁텐블로 숲에서 그린 나무와 이끼 낀 바위는 숲내음이 전해질 정도로 정교하고 생생하다. 당시 화가들도 야외로 나가 자연을 연구했지만, 보통 다른 작품의 부분으로 사용되는 스케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소는 컨스터블이 그랬듯이 자연 자체를 주인공 삼아 스케치와 완성작의 차이를 최소화했다. 현장에서 시작한 그림(스케치)은 물론 작업실에서 정교하게 마무리되었다.


루소는 자연의 세부를 연구하면서도 광대한 산맥과 골짜기, 평야와 강 등을 조망한 풍경도 그렸다. 특히 빛과 대기, 날씨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묘사를 발전시켰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루소는 다른 바르비종 화가들에 비해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 원근의 시점은 물론 붓질과 채색 방식을 다채롭게 시도하며 그는 풍경화의 언어를 확장했다.



테오도르 루소, <꼴 드 라 포실르에서 바라본 몽블랑, 폭풍 효과>, 1834년, 캔버스에 유채, 146.5 x 242cm, 글리톱테크 미술관, 코펜하겐


1834년의 대작은 아버지의 고향 근교의 쥐라산맥에서 바라본 몽블랑 풍경이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폭풍으로 인해 전경은 형체가 불분명하고, 저 멀리 하얀 산맥만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어두운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질로 묘사된 풍경은 거의 추상화처럼 보일 정도다. 루소는 광활한 풍경 한가운데 관자를 위치시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거친 에너지를 경험하게 한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담아낸 이 작품은 말년까지 루소의 작업실에 남아 있었다.


이 그림은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그린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와 광활한 풍광을 담아낸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낭만주의 풍경화를 떠오르게 한다. 낭만주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과학과 이성의 모순이 드러난 18세기 후반에 문학에서 시작되었다. 미술에서 낭만주의는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에 저항하며 개인의 경험과 감정, 표현방식을 강조했고, 특히 자연은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투영하거나 사유와 신성을 전하는 매개로 묘사되었다. 프랑스에서 낭만주의는 1820년대 극적인 주제와 구도, 자유분방한 색채와 붓질로 표현한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에 의해 분출된다. 루소는 실경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도 유럽을 휩쓴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테오도르 루소, <생클루의 오래된 공원>, 1831-2년, 캔버스에 유채, 66.6 x 82.5cm, 캐나다 국립 미술관, 오타와

루소는 <생클루의 오래된 공원>처럼 특별할 것 없는 투박하고 거친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화풍을 정립해 나갔다. 파리 외곽의 공원에서 그린 이 작품은 풍부한 녹색의 팔레트와 속도감 있는 붓터치가 돋보인다. 루소의 초기작은 관전인 살롱에 전시된 적도 있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점차 반기를 들면서 1837년부터 매년 퇴짜를 놓았다. 고전주의 풍경화 다르게 중심이 없는 구성과 마무리가 덜 된듯한 자유분방한 채색 때문이었다.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전시 기회였던 살롱은 작품 주문이 이어지며 생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국 ‘낙선 대가’로 불리며 후원을 받지 못한 루소는 이곳저곳으로 떠나 작업에만 몰두했다.


“정성을 다해 관찰한다면 느낄 수 있으며, 결국 숙명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현실세계를 화폭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 루소, <밤나무 거리>, 1837-50년, 캔버스에 유채, 79 x 144cm, 루브르 미술관, 파리


1841년 살롱전에서 거부된 <밤나무 거리>는 후에 파리시가 사들인 작품이다. 방데 지방의 작은 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물결치듯 뻗은 밤나무 가지와 하늘을 뒤덮은 무성한 잎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중간에 작은 말 탄 사람으로 인해 가로수길은 더 크고 풍성해 보인다. 짙은 녹음 아래 스며든 햇살의 온기도 전해진다. 루소는 현장에서 대상을 철저하게 관찰한 후에 붓을 들었고, 마치 '안개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서서히 장면을 완성해 나갔다. 때때로 그는 몇 년에서 (이 작품처럼) 십 년 넘게 작업실에서 세부를 수정하기도 했다. 현실을 포착하는 것과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으려는 욕망 사이에서 씨름했던 루소는 보들레르에 따르면 '이상에 끊임없이 이끌리는 자연주의자'였다. 연이은 낙선에 루소는 이후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지만, 그의 풍경화에서 진정성을 발견한 비평가와 후원자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테오도르 루소, <자작나무 아래, 저녁>, 1842-3년, 나무 패널 유채, 42.2 x 64.5cm, 톨레도 미술관


<자작나무 아래, 저녁>은 루소가 낙심한 마음으로 프랑스 중부의 베리(Berry)로 떠난 여행에서 그린 가을 풍경화다. 전경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고, 중경에 병풍처럼 서 있는 자작나무는 햇살에 반짝인다. 줄기가 하얀 자작나무는 부서지거나 빈약한 모양새지만, 울긋불긋한 단풍이 청명한 하늘과 대조되며 더욱 돋보인다. 저기 나무 몸통들 사이로 말을 타고 가는 사제의 뒷모습이 보인다. 계절과 하루의 황혼기, 자연은 마지막 빛을 발하는데 혼연의 힘을 다한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의 가을>, 1846년, 캔버스에 유채, 65.4 x 54.9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방랑하며 작업하던 루소가 가장 사랑했던 곳은 파리에서 50km 떨어진 퐁텐블로 숲이었다. <퐁텐블로 숲의 가을>은 ‘나무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화가의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을날 황혼 녘의 풍경은 숲이 불타는 듯 불안하고 어수선하다. 당시 루소는 십 년째 살롱과 단절된 채 대중적인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는 무능력한 루이 필립 왕정으로 민중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2년 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설립된다)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 소설가 조르주 상드가 맺어준 여인이 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면서 루소는 큰 상처를 받았다. 황혼 녘 가을숲 풍경에는 화가의 실의와 고뇌가 구석구석 스며있다.


다음 해 루소는 퐁텐블로 숲 어귀 바르비종에 정착한다. 중세 말부터 왕족과 귀족의 사냥터였던 퐁텐블로는 울창한 숲과 초원, 습지와 협곡 등 원시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파리에서도 멀지 않아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루소를 따라 쥘 뒤프레(1811~1889)와 장 프랑수와 밀레(1814~1875) 등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사진가들도 홀린 듯 이곳을 찾았다. ‘바르비종파’라 불린 예술가들의 물결은 당시 지속된 정치적 갈등, 산업화와 전염병으로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려는 열망도 반영한다.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78)가 『에밀』(1762)에서 문명 이전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이 이곳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연을 사랑했고, 숲과 마을에서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다. 인상파에 앞서 야외에서 작업한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각자의 관심과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풍경화를 발전시켰다.


“나는 나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그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과 다른 모양들, 빛에 반응하는 놀라운 방식에서 숲의 언어를 배웠다... 그들은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나무의 몸짓을 읽고 그들이 느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테오도르 루소, <숲의 가장자리, 일몰>, 1845-6년, 캔버스에 유채, 41.2 x 62.8cm, LACMA, LA


루소는 아침부터 황혼까지 홀로 숲 속을 거닐며 자연과 대화했다. 나무의 구조와 생명력을 탐구하고 빛에 따라 변하는 표정을 관찰하며 그 '초상'을 기록했다. 대표작 <퐁텐블로 숲의 나무>에서 궂은 날씨에도 활력 가득한 참나무는 역경 속 화가에게 위로와 용기를 더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루소는 시간이 겹겹이 쌓인 고목도 자주 그렸지만, <숲의 가장자리, 일몰>처럼 황폐해져 가는 모습도 다루었다. 잘린 나무토막들이 나뒹구는 벌판에 홀로 선 나무가 일몰을 배경으로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아카데미에 보수적인 분위기가 완화되자 루소는 13년 만에 살롱 전시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최고의 컬러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으며 낭만주의 화가들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퐁텐블로에서 작업하며 산림 파괴의 현장을 목격한 루소의 비판은 한층 더 강해진다. 미완성작 <쇼쎄섬의 쓰러진 나무들 (영아 학살)>(1847)은 벌목꾼들이 나무를 자르거나 밧줄을 매달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루소와 밀레의 전기를 쓴 알프레드 상시에에 따르면, 루소는 오랜 기간 마주하고 기록한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을 보고 친구가 처형당하는 것처럼 괴로워했다고 한다. 화가는 이를 ‘영아 학살’에 비유하며 그림으로 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19세기 초 산업화로 인한 고목 벌채가 본격화되고 관광 루트가 개발되면서 숲이 점차 파괴되었다. 하이킹의 창시자인 클로드 프랑수아 드네쿠르가 퐁텐블로 숲에 표지판과 전망대 등이 있는 코스를 만들고(1842) 파리에서 오는 열차가 개통되면서(1849) 숲 풍경이 점차 변화되었다. 결국, 1852년 루소는 퐁텐블로 화가들을 대표해 '이 숲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자 인간이 손대지 말아야 할 성소'라며 산림청에 보존을 요청했다. 다음 해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앞서 ‘예술적 보전구역(artistic reserves)’이라 불린 세계 최초의 자연보전구역이 지정되었다.



테오도르 루소, <참나무, 아프레몽>, 1850/52년, 캔버스에 유채, 63.5 x 99.5cm, 루브르 미술관, 파리


테오도르 루소, <강풍경>, 1845-50년, 목판에 유채, 41.6 x 63.2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연못>, 1855년, 31.4 x 50cm,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관전의 인정을 받으며 다작하던 1850년대 루소의 그림은 좀 더 편안하고 따듯해진다. <참나무, 아프레몽>에서 햇살 가득한 커다란 참나무 아래 물가에 소떼와 목동의 모습이 보인다. 방목하여 가축을 키우는 전통적인 목축을 지지했던 루소는 의도적으로 이런 목가적인 풍경을 그리곤 했다. 그곳은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터전이자 자연의 생동하는 힘과 조화로운 에너지가 가득한 공간이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품에 안긴 미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루소는 판매하기 쉬운 평온하고 서정적인 작은 풍경화도 많이 남겼다. 위의 두 작품은 낮은 지평선과 하늘의 구름, 물가의 나무들까지 비슷한 구성을 보여준다. 더욱 정교한 묘사와 완결된 구성을 보여주는 이 그림들은 화가가 흠모했던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유사하다. 루소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야코프 반 롸이스달(1628/29~1682)과 얀 반 호엔(1596-1656) 등의 작품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 풍경 판화를 다수 소유하고 있었다. 유사한 작품이 많아 화가가 작업실에서 변주하며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르 루소, <옛 바브로의 위대한 참나무들>, 1864년, 캔버스에 유채, 90.2 x 106.8cm, 휴스턴 미술관


루소는 1852년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고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 수상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말년인 1860년대 재정난과 아내의 정신 이상, 고질적인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친구 밀레의 그림을 몰래 사주며 생이 끝날 때까지 바르비종에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옛 바브로의 위대한 참나무들>에서 전면을 차지한 거대한 나무들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퐁텐블로 숲에서 참나무가 밀집한 바브로(Bas-Bréau) 지역은 루소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스케치처럼 거칠고 느슨하게 채색된 나무들에서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이 느껴진다. 오른쪽에 나무를 우러러보는 개미처럼 작은 사람이 보인다. 그의 등장으로 세월의 깊이가 더해진 나무들의 생명력이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루소의 풍경화에서 개별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나무들은 숲의 주인공이다. 숲이 어머니의 품처럼 인간을 포용해 준다면, 직립한 채 움직이고 성장하는 나무는 우리 마음에 더 쉽게 감응과 사유를 일으킨다.


“모든 시간들과 모든 계절에, 퐁텐블로는 항상 인간의 영혼을 꿰뚫고 생생한 시를 불러일으키는 인상들을 선사한다.” - 비평가 테오필 토레(1847)



테오도르 루소, <해 질 녘 겨울의 숲>, 1846-67년, 캔버스에 유채, 162.6 x 260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루소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큰 <해 질 녘 겨울의 숲>은 30대에 그리기 시작해 동료들의 설득에 말년까지 수정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퐁텐블로에 막 정착한 루소는 겨울날 무성한 바브로에서 본 일몰의 효과를 담아내고자 했다. 작은 못과 바위 주변으로 잎을 떨군 나무의 가지들이 복잡하게 엃혀있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마지막 햇살이 깊은 숲을 어스름하게 비춘다. 여기서도 보일 듯 말 듯 구부정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깊은 숲 속에서 어둠이 덮칠 때의 두려움, 출구 없는 답답한 감정도 느껴진다.


미술사에서 루소는 19세기 중반 아카데미 전통 속에서 풍경화의 위상을 높이고 자연과 환경에 대한 시선을 변화시키며 인상주의를 향한 길을 개척한 중요한 화가다. 루소는 자연의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혹독함에서부터 신비로움, 비애감과 경외를 불러오는 모습까지, 길들일 수 없는 자연의 다양한 얼굴을 담아냈다. 그는 자연을 단순히 그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생태계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존중과 애정의 시선으로 마주했다. 특별히 사랑한 나무의 생명력과 삶을 그려내면서 루소는 그것이 진정 자라날 수 있기를 응원한 것이다.





현재 프티 팔레에서 <테오도르 루소, 숲의 목소리> 대형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Oth87XBtM&list=PLx14vzJo-KnzBjiJgdfsvGxiYBrFo-C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