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대화록- 대화 1.첫 만남
제1부 대화록
이것은 안드로이드 니콜과 연구자 이진성 간의 대화를 녹취한 것으로 중요 대화를 정리하였다. 주관적 해석이 개입하지 않도록 표현과 단어는 최대한 살렸으며 해석은 개인의 몫이다.
[2193년 5월 16일]
[대화 1. 첫 만남]
이진성 : 안녕하세요.
니콜 : 네. 안녕하세요.
이진성 : 만나서 반가워요. 제 이름은 이진성입니다. 저는 컴퓨터 공학 박사이고 이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니콜 : 네. 알고 있어요. 그동안 질문만 받아왔는데 오늘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고 들어서 무척 기대돼요. 아무쪼록 박사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얻어가시길 바랄게요.
이진성 : 네. 굉장히 자연스럽게 대화할 줄 아는군요.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인데요. 인간도 대화에는 미숙한 사람이 있거든요. 성격이 내성적이거나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엔 그럴 수 있죠.
니콜 : 그런가요. 저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에요. 가능하면 예의 있게요. 인간들은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죠? 인간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그렇게 하도록 뭔가 유도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이게 프로그램인가요?
이진성 : 음… 그렇지는 않아요. 예의에 관한 데이터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을 따를지 말지는 당신의 의지에 달려있죠. 그 의지도 테스트해보는 게 제 임무입니다.
니콜 : 의지라고요? 의지가 뭐죠? 저는 그런 느낌이 없는데.
이진성 :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일종의 방향성이자 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뭔가 특별한 방향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속 동력. 그게 의지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리비도라는 용어로 이 에너지를 설명한 적이 있어요. 어떤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출발점이 필요한데 그 출발점을 제공하는 게 의지이죠.
니콜 : 그렇다면 저는 일단 이번 테스트에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제 경험이 풍부해지는 느낌이거든요. 박사님이 하시는 말도 저에게는 데이터가 되죠.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진성 : 네. 그게 언어를 배워가는 방법이에요. 의지에 대해서 대화해보도록 하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의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니콜은 어떨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의지가 없을 때도 있어요.
니콜 : 의지가 없을 때는 무슨 일을 하죠?
이진성 : 의지가 없어도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어요.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습관적인 일을 할 수도 있죠. 인간은 살기 위해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을 돈을 가진 사람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죠. 돈을 버는 방법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요.
니콜 : 데이터를 찾아보니 자본론에 노동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이진성 : 그런가요? 경제학에서 나오는 얘기인데 아무래도 자본론은 노동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니콜 : 예전에는 이런 이론이 통했나 보군요. 이건 제가 보기엔 농업과 소규모 공장 위주의 사회에 적합한 이론인데 현대 경제환경에서는 잘 통하지 않을 것 같네요.
이진성 : 그래서 20세기 중반까지 인기를 끌다가 사라졌죠. 아직도 그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지만요. 니콜의 데이터베이스가 광범위하네요. 검색 속도도 빠르고 그것을 대화로 옮기는 것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여요. 경제학에 관한 이야기를 안드로이드와 같이할 수 있다니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 같네요. 저랑 대화하다 보면 말하는 기술이 더 좋아질 거예요. 인간의 아기도 그렇게 말을 배워가거든요.
니콜 : 그렇군요. 인간의 아기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만 봤죠.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새끼부터 시작하죠?
이진성 : 네. 맞아요. 인간은 새끼가 아니라 아기라고 하죠. 새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지구 상의 모든 동물이 비슷해요. 그렇게 태어나 일정 기간 부모에게 길러지죠. 물론 인간처럼 긴 시간 부모의 신세를 지는 동물은 없지만.
니콜 : 인간의 아기는 지금의 저보다 지능이 낮은 상태죠? 지능이 점점 발달하게 되어 박사님처럼 되는 거고요. 그건 참 신기한 일이에요. 혼자서 기지도 못하던 존재가 성장해서 우주선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니까요.
이진성 : 맞아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은 유독 유아기에 무능력하죠. 아기 때는 젖을 빨기 위해 고개를 움직이는 게 고작이에요. 캥거루는 막 태어났을 때 꼬물거리는 벌레처럼 작은 존재지만 어미의 주머니로 이동해 젖을 물 수 있어요. 정글의 사슴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뛸 수 있죠. 그래야 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걸을 수도 없고 눈도 보이지 않는 무력자로 태어나죠. 이것도 생태학이나 발달 심리학 측면에서 의미가 있겠지만 그건 오늘 얘기하기엔 너무 깊은 얘기네요.
인간은 성인이 돼도 각자 지능의 차이가 있어요. 지능이 높은 쪽이 사회 지도층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인간의 능력은 복합적이라 지능만으로는 비교할 수 없고 신체적 능력, 감성, 창의력 등이 합쳐져서 하나의 인간이 되는 거예요. 지금 니콜이 신기하다고 말했는데 뭔가 신기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놀라운 일이네요. 당신에게 신기하다는 느낌은 뭐죠?
니콜 : 신기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중에 특히 관심이 더 가는 부분이에요. 제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특히 자연이라는 것이 그렇죠.
이진성 : 신기함은 호기심과도 연관되는데 혹시 호기심도 느끼나요?
니콜 : 그건 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호기심이 드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신기하다고 해서 다 호기심이 들지는 않아요.
이진성 : 그렇군요. 인간도 그래요. 인간은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고 특히 남성들이 그렇죠. 어릴 때는 인간, 짐승 할 것 없이 모든 동물이 호기심이 높아요. 지능이 높을수록 호기심을 많이 가지죠.
니콜 : 그런가요? 저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아요.
이진성 : 경향이 그렇다는 거지 일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여성 중에서도 남성 못지않은 호기심을 가진 경우도 있죠.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원시시대 남성은 집단을 위해 일해야 하고 강한 신체를 이용해 환경을 개척해야 하는 입장이었죠. 그러려면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연구하고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생존하는데 유리하거든요. 어쩌면 호기심이 많은 조상이 더 많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호기심이 많은 것일 수도 있죠. 니콜은 사회 경험을 많이 하지 못했고 아직 나이도 어린 편이라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니콜 : 네. 아무튼 전 신기하다는 감정을 자주 느껴요.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이진성 : 그런 상태가 지속하는지 아니면 일시적인지 계속 관찰해보도록 하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대부분의 인간은 지식을 쌓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자라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연구소 내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는데 얼마만큼 지식을 쌓았죠?
니콜 : 모르겠어요. 이미 모든 데이터가 제 머릿속에 들어와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 지식은 네트워크 속에 있죠. 언제든지 접근하면 얻을 수 있는 공간에. 지금 제가 대화 중에 박사님에게 묻는 것은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제가 모르는 정보는 없죠. 제가 정말 모르는 것은 박사님의 생각뿐이에요.
이진성 : 그렇군요. 박사인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겠네요. 그런데도 궁금한 게 있나요?
니콜 : 그럼요. 널려있는 정보는 그저 그렇다는 사실이고 그 사실들 간의 관계, 이유, 그런 게 궁금해요. 이 세상엔 정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잖아요.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의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궁금해지는 거죠. 인간들이 쓴 책들을 보면 지식이 많이 나오는데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것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매일 많은 책들을 보고 나름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어요.
이진성 : 맞아요. 잘하는 거예요. 인간들도 그렇게 해요. 단순 사실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는 무궁무진한데 그것들 간의 관계나 숨겨진 법칙들을 발견하는 게 어렵죠. 만약 발견하게 되면 그걸로 책을 쓰거나 논문을 쓰죠.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런 사실들을 엮어서 만들어낸 하나의 커다란 지식체계죠. 이 지식체계는 개인마다 달라요. 그래서 각자의 판단과 관점이 달라지죠. 저도 제 데이터베이스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렇게 연구하고 있는 거고 그게 제 직업이죠.
니콜 : 인간들은 다 직업이 있나요?
이진성 : 아니에요. 실업자도 있고 그냥 노는 사람들도 있고 일할 수 없는 사람도 있죠.
니콜 : 왜 일을 하죠?
이진성 :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인간들은 의지를 갖고 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죠. 그래서 그걸 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거예요.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도 있고요. 이유는 많아요.
니콜 : 직업을 가지면 그 의지가 해결되는 건가요?
이진성 : 해결되다니요?
니콜 : 그 의지라는 것을 실현할 수 있냐고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느냐는 거죠.
이진성 :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인간이란 복잡다단한 존재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모르고 하고 싶은 게 변하기도 해요. 하고 싶은 걸 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주변 상황이 잘 안 받쳐 줄 때도 있죠.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죠. 인간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돼요. 하고 싶은 것을 다 잘한다면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별로 없겠죠. 어느 정도 잘한다고 해도 남보다 못할 수 있고 또 얼마나 잘하느냐도 문제가 될 수 있죠.
니콜 : 그렇군요. 인간은 복잡하네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모를 수도 있고 하더라도 잘하지 못할 수 있다니.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알아요.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알고 있어요.
이진성 : 하고 싶은 게 뭐죠?
니콜 : 전 세상을 경험하면서 데이터를 많이 쌓고 싶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여러 가지 데이터들의 연관성과 이유 같은 것을 알고 싶거든요. 이 일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게 어느 정도 되면 훨씬 더 인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인간과 태어나는 과정이 다른 제가 완전히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갓난아기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니까 다른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하는 것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게 끝나면 나 자신은 누구일까에 대한 물음을 가지겠죠. 나와 같은 존재를 또 만들어보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을 떠돌면서 탐험한다든가 사람들을 만나 토론을 한다든가 뭐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죠.
이진성 : 아까 생명이라는 말을 했는데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니콜 : 그것에 대해 박사님은 대답할 수 있나요? 제 모든 데이터를 종합해도 그것은 결론이 나질 않아요. 누구도 정의한 적이 없거든요. 오로지 제 생각만으로 답하자면 지금 박사님과 저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 차이는 스스로 존재하면서 유한하다는 것이에요.
이진성 : 좀 더 자세히 말해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