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르히아이스 Apr 08. 2019

28. 주변의 반대를 무릅쓴 사랑

주변의 반대를 무릅쓴 사랑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힘든 사랑을 하는 커플을 가끔 보는데 이런 경우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때로는 금기를 넘어선 사랑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두 사람이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논리는 무책임하다. 두 사람이 보다 행복한 사랑을 하기 위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사회는 고도화될수록 다원화되고 파편화(개인주의화)된다. 이것은 개인의 기호와 개성이 더 다양화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회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을 때 상상력, 창의력등이 모두 얼어붙어 개인의 욕구마져 획일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선진국일 수록 더 많은 직업, 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가 아직 이 단계에 접어들지 못하고 간섭하고 대세에 따라야 한다는 강요를 한다. 우리나라도 높은 수준의 개인주의가 이뤄진다고 보긴 어려워 사랑에도 간섭이 많은 편이다. 이게 옳은 일일까?


 부모나 가족 입장에서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본인의 고정관념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하고 나설 수 있다. 주변 사람들도 여러 이유로 멸시하거나 차가운 눈길을 보낸다.


 구체적으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쓴 사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표적으로 동성애가 있을 것이고 종교적 신념의 차이, 경제적 수준의 차이, 지역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 나이 차이로 인한 반대 등 다양할 것이다. 인도에서는 종교가 다른 두 부족의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가 여성이 돌팔매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이런 일을 볼 때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가?



반대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무엇인가?

 남의 사랑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안마다 반대하는 이유는 다를 것인데 일단 사회적인 반대부터 보자. 이것은 옆집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오히려 가족이나 지인들은 받아주고 응원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반대를 한다.


 이런 반대는 광범위한 것이라 굉장히 가슴 아프고 사랑을 유지해나가기 힘들다. 어떤 항변도 먹히지 않고 개인이 사회를 향해 어떻게 할 도리도 없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동성동본 커플은 금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없을 수도 있는데 같은 성이란 이유만으로 마치 친척이나 가족처럼 결혼에 제약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4촌 이내에 대해 금지하는 법은 있지만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누가 정한지도 모르는 전통이란 것은 때로는 법이라는 현대의 탈을 쓰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게 옳은지 아닌지는 누구도 따져본 적 없이 말이다.


 이렇게 사회가 강제하는 금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진 커플들도 많이 있었다. 오죽하면 동성동본 결혼을 주제로 한 유명 가수의 노래도 있었다. 사실 동성동본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에 가깝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같이 가져오는 것인데 성이라는 것은 아버지 성만 따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동성이다 아니다 규정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일이란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양반을 제외하고는 국민의 80%가 성도 없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양반이 증가하고 호적을 사고팔아서 지금의 성이 진짜 성인지도 불확실하다. 씨족 사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이런 발상이 현대에 와서도 유지된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정해놓은 금기라는 것이 깨기 힘들다는 얘기이다. 


 종교에 대한 것도 있다. 모든 종교가 율법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성은 욕구에 해당되고 사람을 유혹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에서 성에 관해서 매우 엄하고 보수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다 보니 혼전순결이나 동성애 금지 같은 규율을 강조한다. 뭔가 인간이 즐길만 하면 금지하는 게 율법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즐거움=죄 라는 종교의 기본적 인식이 여기서 드러난다. 


 사실 즐거움을 죄로 여기는 것은 즐거움이 커지면 타락한다는 경계의 측면도 있지만 즐거운 사람은 종교를 찾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종교는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커플이 결혼에 이르는 것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부모가 반대할 수도 있고 자신이 용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종교가 다른 사람 간에도 사랑이 가능할까? 유대교나 이슬람교처럼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율법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라면 사랑 자체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고 본다.


 서로 상대방의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남겨두고 간섭하지 않는다면 사랑에는 지장이 없다. 사랑이 이루어질 시기에는 이런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다가 결혼하는 단계에 가면 생각이 달라져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종교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어떤 종교는 자비를 최고의 덕으로 여긴다. 그런데도 종교가 다른 자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 종교는 사적 영역으로 놔두고 그 사람이 사적으로 잘 관리하고 서로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종교가 달라도 서로 사랑하는 데 문제가 없다. 생활양식이 좀 다를 수 있지만 몇 개 종교를 제외하면 종교가 생활에 엄격하게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마치 원리주의자처럼 종교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점은 안타깝다.


 인종이나 지역에 대한 반대도 있다. 백인 집안에서는 흑인(특히 남성)이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을 수 있다. 영화 ‘겟 아웃’을 보면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만약 백인 아들이 흑인 여성을 데려왔다면 그렇게 반대했을까? 


 이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왜 유독 딸의 남자에 대한 반대가 심한 것일까? 이것은 남자가 대를 잇는다는 전통적 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잘못된 개념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가 대를 잇는다는 관념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 들어온 가족이 여성일때는 다른 인종, 다른 지역이라도 정통성이 유지된다고 보고 반대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성일 때는 가문의 혈통이 깨진다고 보고 반대한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남성이 대를 잇는다는 이른바 '적통'에 대한 집착은 남아있다. 딸의 남자가 다른 일종일 때는 내 혈통을 오염시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여성이 다른 인종일 때도 내 아들을 유혹해 혼혈을 만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성만큼 심하게 반대하진 않는다.
 

 인종간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것이 인간생활에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흑인 변호사도 있고 백인 농구선수도 있다. 인종에 집착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인종차별은 없지만 지역 간 차별이 있다. 호남과 영남 지방간의 악감정으로 인해 결혼 시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역시도 과학적 근거가 없는 감정싸움일 뿐이다. 단지 어느 지역 출생이란 것 만으로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이것은 당사자들의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열심히 벌면 된다지만 고향은 어떻게 바꾸란 말인가?

 직업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반대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 이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런 반대는 당사자도 수긍하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직업이나 경제적인 것은 변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더 좋은 직장과 경제적 조건의 사람을 제시하면 그에 따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직업이나 경제적 수준이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는 비교적 비현실적이며 무시하고 사랑을 진행해도 현실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직업, 경제적 문제는 다르다. 잘 사귀던 커플도 이 문제에 부딪히면 쉽게 무너진다. 직업이 좀 별로라도 사람이 좋아서 사귀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를 접하고 보니 미래를 생각해서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종교, 인종의 문제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비교적 합리적인 반대이기 때문에 먹혀드는 면도 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할 것인가?

 주변이 반대하는 사랑은 외로운 싸움이 될 것이고 두 사람의 관계마저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에 모험이다. 만약 사랑을 유지한다고 해도 나중에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다면 더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해야 할까?


 이것은 몇가지 생각을 해보면서 판단을 내리는 게 좋다. 우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합리적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근거가 없고 오로지 관습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반대라면 자신의 판단을 믿고 사랑을 유지해도 좋다. 반대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고 오로지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반대 이유가 합리적이라면 당사자들이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냥 무시하고 살 수도 있지만 아무리 무시해도 일단 주변에서 계속 반대한다면 스트레스가 되고 두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계속 듣다보면 점점 수긍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반박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더라도 후회가 없다.


 여기서 반박은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면 된다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인간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사랑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고 내가 주체인데 주변의 의견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본인들에게 득 될 것이 없다. 남들의 만족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인간인 이상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사랑이란 결국 두 사람을 위한 것이고 두 사람이 행복하다면 누구도 그것에 이견을 달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설사 그들이 사람들의 예견대로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을 지라도 그들의 결정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인생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주위 시선에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번듯한 집과 직장, 멋진 아내, 능력 있는 남편이 있어야 행복이 손에 잡히고 사랑도 가능할 것 같은가?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남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작은 것에도 행복하고 감사할 줄 알며 상대방의 사랑에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도덕적 비난의 소지가 있는 사랑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다른 종류의 비난받는 사랑은 어떠한지 얘기해보자. 단순히 금기나 관습에 의한 반대가 아닌 불륜, 스승과 제자의 사랑처럼 도덕적 비난의 소지가 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지 여부를 묻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불륜이 억압에서의 탈출 차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그것은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순수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랑은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되며 강자의 지위를 활용해서도 안된다. 스승과 제자의 사랑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인간인 이상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은 우월한 지위이며 어린 학생들은 이런 스승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이성과 감성 모두를 지배당할 수 있다.


 직업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직업에 맞는 윤리의식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금융감독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내부정보를 이용해 주식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된다. 그가 금융정보를 다루는 곳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교사도 학생을 가르치기 때문에 학생들을 사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직업윤리에 문제가 없다면 오로지 사랑에 관해 순수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람대 사람으로서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단순한 욕구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배경에 끌린 것인지 말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클리어하고 나면 개인들이 사랑을 하더라도 욕할 바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반대에 부딪힌 사랑은 어떻게 해야하나?

 주변의 반대를 안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가까운 지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자기 스스로 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자신들의 사랑이 어느 정도 인지 생각해보고 인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절박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나는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의견이지만 부모의 반대든 세상의 반대든 축복 없는 결혼은 두 사람에게 힘든 미래를 줄 수밖에 없다. 그런 고난과 희생까지도 각오할 수 있다면 사랑을 이어갈 자격이 있다.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가 아닌 사랑이 식더라도 그 사람을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때로는 남들이 반대하면 더 하고 싶어 지는 게 인간 심리이다. 이런 점도 고려하여 사랑의 미래를 선택해야 한다. 모든 사랑이 축복받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관심 속에, 때로는 저주받는 사랑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당신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없듯이 당신이 불행해진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반응보다는 사랑을 통해 행복을 얻고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해 나가려고 하는 두 사람의 의지가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반대했던 사람들도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