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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내이팅게일 Feb 21. 2022

Good enough nurse

winnicott


정신과 병동으로 막 발령이 나고 한 동안 나는 열심히도 일했다. 사소한 것들 하나에도 사소한 것이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있었다. 욕심이 커지는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좌절을 하기도 많이 했다. 멈추지 않는 자해 현장을 보면서 의욕을 잃기도 했고,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는 자살을 시도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이들끼리 싸우는 날에는 모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감 피로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보이지 않는 데미지가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이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원데이 클래스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참여하거나 명상을 배우는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아마 힘겨웠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초심의 모습을 잃어갔고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까지 개입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



정신과에서 간호사라는 직군은 참으로 어렵다. 일상생활 관리, 위생 관리, 투약 관리, 안전 관리, 환경 관리, 학습 관리, 식이 관리, 행동 관리, 활동 요법까지 한 사람의 삶의 전반적인 영역의 모든 부분에 개입한다. 나는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적정한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명상을 가르치거나 미술 요법을 하는 내 모습이 본질에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활동들은 간호사로서 해야 하는 일 그 이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적극적인 개입은 의사가 치료의 중심에 있는 병원의 시스템 속에서 내가 선을 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손잡이를 고칠 수 있다고 해서 병원의 설비과가 있는데도 고쳐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의사도 신경 안 쓰는 걸 내가 신경 써서 뭐하나'와 같은 생각도 했었다고 고백한다.



상담을 받으면서 이러한 내 모습을 마치 그동안 Rescue fantasy(구원 환상)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분석했다. 선생님은 구원 환상의 정확한 해석과 함께 날카롭게 지적해주셨다. 그 말을 듣다 보니 어쩌면 나는 구원 환상이라는 변명을 통해 소진에 대해 방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환자들에게 베풀 사랑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황에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구원 환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회피했다.



선생님께서는 환아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  같은지 물어보셨다.  번도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최근 어떤 아이가 '사촌 오빠'같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어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엄청 친밀한 것은 아니지만 힘든 일이 있을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 가족에게 하지 못하는 말들도 오히려  쉽게 꺼낼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같기도 하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하는 활동들을 지지해주셨다. 선을 넘는 것이 아니라  선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협업을 통해 아이를 치료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위로해주셨다. 그러면서 위니콧의 'Good enough mother_충분히 좋은 엄마' 이야기를 하셨다. 이는 유아의 심리적 성장과 발달의 요구를 가장 적절하게 수용하고 반응해 주는 양육자를 의미한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신의 사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성 본능에 따름으로써 '충분히 좋은' 어머니가 된다. 위니콧은 이것은 자발적인 과정이며,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한 안내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초기에 완벽했던 어머니의 적응은 차츰 감소하고, 적응에 실패한다. 이것은 아이에게 자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때 아이는 전능감의 경험을 상실하지만, 그 대신 모험심을 얻게 되고, 대상 세계에 대해 분화된 공격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Good enough nurse_충분히 좋은 간호사' 란 어떤 모습일까. 아직도 나는 직업에 대한 혼란 속에 있지만 충분히 좋은 간호사이고 싶다. 자기 돌봄을 통해 충분한 에너지를 축적하고 이를 환아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고 싶다. 나의 소진과 힘듦 속에서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고 싶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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