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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현 Mar 17. 2022

손녀딸로서 처음 해보는 일

할머니 댁은 하신양 4반

"어느 집이여?"

"아 저는 저기 앞집에서..."

"할아버지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박태평이네 손녀딸인가?"


기차역에서 내리면 카카오 택시를 불러 할머니 댁에 갈 생각이었다. 4시간 가까이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받고, 기차 너머로 보이는 시골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고, 미국 출국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 뒤에 홀로 미국 땅에 떨어질 뻔했지만,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교환교에서 2주간 비대면 수업을 공지한 탓에 출국일이 2주 밀리게 되었다.


출국 두 달 전부터 주변 친구들과 선배들, 대학 동기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고 약속을 잡느라 시골에 계신 할머니는 이렇게 출국 날짜에 직면해서야 뵈러 가는 참이었다. 원래 있던 약속과 일정에 변경이 생기면서 겨우 하루 시간이 났고, 시골에는 느지막한 5시쯤 도착하고 다음날 점심 전에 서울행 기차에 올라야 했다. '출국 밀릴 줄 알았으면 좀 더 여유롭게 오는 건데...'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골에 혼자 내려가서 할머니와 단둘이 무료한 시간들을 보낼 자신도 없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시골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냐며, 얼른 앞에 보이는 택시 타고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오라셨다. 기차 시간을 미리 알려드리긴 했지만, 내리자마자 오는 전화에 새삼 놀랐다. 저녁에 할머니랑 같이 구워 먹을 삼겹살과 목살을 근처 마트에서 사고, 카카오 택시 앱을 켜서 할머니 댁 주소를 입력했다. 눈앞 택시정류장에 당장 탈 수 있는 택시가 여럿 있었지만, 할머니 댁까지 가는 길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카오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결국 택시정류장의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주소를 불러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당황스러웠다.


"하신양? 몇 반 인디?"


사촌언니한테 받은 할머니 댁의 주소를 읊어드렸는데, 갑자기 몇 반이냐고 물으시니 뭐라 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핸드폰으로 내비를 켜고 기사님이 옳은 방향으로 가시는지 계속 확인해야 했다. 나중에 할머니 말씀이, 마을 동네를 1반부터 4반까지 나누는데, 할머니 댁은 제일 안쪽이라 4반이라는 것이다. 도로명 주소도, 지번 주소도 아닌 시골 마을식의 주소가 신기했다. 전에는 항상 아빠 차를 타고 내려왔으니, 할머니 댁의 주소를 들어본 기억도, 말해본 기억도 없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사온 고기를 굽다가, 사온 고기 절반은 앞집 아지매 가져다주라는 할머니 말씀에, 목살을 챙겨 들고 나섰다. 몇 걸음 바로 앞에 있는 집이지만, 진돗개 여러 마리가 목줄 없이 돌아다니고 있어 들어가는 데 애를 좀 먹었다. 마침 할아버지가 나와 계시길래, 앞집 손녀딸인데 저녁에 고기 구워드세요, 하면서 들고 온 돼지 목살 한 팩을 드렸다. 내가 앞집으로 온 거였으니, 우리 할머니 댁은 뒷집이었을 텐데 당장 눈앞에 할머니 댁이 보여 앞집이라고 얘기했다. 앞집 할아버지는 누구 손녀딸인지 다시 한번 물으셨고,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존함을 여쭈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돌아가셔서 그런지 나의 기억에는 희미하게만 남아계셨고, 성함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몰랐던 것 같다.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리고만 있었는데, 앞집 할아버지는 너희 할배가 박태평이냐 하시며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할아버지 성함은 몰라도, 아빠 성씨가 임 씨인데 설마 박태평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일 리가 없었다. 결국 아빠의 이름 석자를 부르고 나서 우리 할머니 댁이 뒷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 성함이라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마저 바로 기억하지 못했다. 일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불현듯 성함을 떠올렸고 겨우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아무리 시골 할머니 댁에는 명절에만 내려온다지만 스스로도 이건 좀 너무했다 싶었다.


할머니는 성치 않으신 몸으로 날 반길 준비를 잔뜩 하고 계셨다. 김치찌개에 밑반찬에, 사실 몸이 불편하시니 식사는 내가 다 차려드려야겠다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이미 상을 차려놓으신 후였다. 사온 고기만 금세 구워서 할머니랑 난생처음으로 둘이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매번 멀고 시간이 없다며 시골 할머니 댁에는 명절 외에 찾아뵐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해보니 별것도 없거니와 겨우 하루 자고 갈 손녀딸을 이렇게 잔뜩 반겨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가족 간에도 정이 쌓이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시골 할머니와는 계속해서 이렇게 어색한 사이로 남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할머니와 둘이 보낸 하룻밤에 나는 생각을 바꿨다. 마음을 열고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작은 시그널 하나로도, 할머니는 손녀딸을 무척이나 사랑해줄 준비가 다 되어있으셨다. 그동안 손주 손녀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기다리셨다는 듯.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은 하루였다. 할머니와 둘이 식사도, 시골에 혼자 내려가는 것도, 할머니랑 셀카를 찍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별것 아닌 이런 처음들을 열일곱 시간의 시차가 나는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야 해보았다는 게 많이 아쉬웠다. 다른 누구의 칭찬을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시골집에 할머니를 뵈러 혼자 내려온 것만으로 마을 아주머니의 칭찬을 받으니 머쓱하기도 했다.


앞으로 일 년 이상 보지 못할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나 생각나고 그리울까.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바쁘게 사느라 정신없겠지만, 떠날 순간이 되니 괜히 센티해지는 감성을 어쩔 수는 없다. 사실 일 년이 긴 시간도 아니고, 그 이상 보지 못한 친구들도 많지만 낯선 환경에 홀로 떨어질 생각에 덜컥 겁이 나는 것 같다.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감정의 너울을 주고받으면서 출국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기분.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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