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한 와일드함
4월 중순, UCSD의 'Recreation' 부서에서 주관하는 1박 2일 캠핑을 다녀왔다. 'Recreation' 부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체육, 문화 활동을 제공하는데 한국에서는 비싸고 접하기 어려운 펜싱, 테니스 등의 스포츠를 배울 수 있고 주말에는 1박 2일에서 2박 3일 일정의 캠핑도 참여할 수 있다. 미서부에는 크고 작은 국립공원들이 굉장히 많은데, 학교와 멀지 않은 (그래도 차 타고 3시간 정도는 가야 한다.) 곳에 Joshua Tree National Park,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이 있다. 이곳에서는 주인공 조슈아나무를 비롯해서 다양한 사막 식물과 동물들을 볼 수 있다. 밤하늘도 아름다워서, LA 여행 투어 패키지 상품으로도 판매된다.
한국에서 캠핑을 갔을 때는, 사실 말이 캠핑이지 그저 고기를 구워 먹고 친구들과 캠프파이어를 하며 노래를 틀고 춤을 췄던 기억뿐이다. 잠도 캠핑카에서 나름 편안하게 잤다. 심지어 샤워도 했다! 캠핑카 안에 샤워부스가 있기도 했고, 그게 아니라면 보통은 공용 샤워장이 있어 무리가 없었다. 내가 참여한 학교의 캠핑은 엄밀히 말하면 'Backpacking trip'이었는데, 내 몸의 절반 이상 올라오는 거대한 짐가방을 등에 지고 가는 것이었다. 키가 큰 편인 나는 그렇다 쳐도, 나와 함께 간 룸메이트는 정말이지 가방에 곧 집어삼켜질 듯한 모양새였다. 각자 가져온 짐에 침낭, 냄비, 물, 파스타면과 소스, 소시지, 헤드라이트, 선크림 등을 나눠 실었다. '담았다'보다 '실었다'가 조금 더 어울렸다.
가방에 짐을 싸는 것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라, 가이드 학생들이 알려주는 대로 가방에 차곡차곡 짐을 넣었다. 가이드는 같은 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근로장학생 정도의 개념인 듯했다. - 가이드는 총 세 명으로 그들의 이니셜만 따서 J, E, C라고 하겠다.- 침낭이 아래를 받쳐주도록 침낭을 가장 아래쪽에 두고, 무거운 물건들을 침낭 위에 넣고, 중간중간 꺼내야 하는 물건들은 손이 닿는 앞주머니에 욱여넣기. 가방 위쪽으로 물건이 쌓이면 힘들다고 웬만한 것들은 전부 가방 아래에 위치한 작은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다. 침낭도 들어갈 것 같지 않던 주머니는,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내가 가져온 여벌의 옷과 선크림, 립밤까지 몽땅 들어갔다. (사실 침낭도 제대로 넣지 못해서 J가 도와줬다.)
-오늘 밤에 바람이 심할 것 같지는 않은데, 밤에 잘 때 별 보고 싶어?
-응, 별 보는 거 좋아해!
-Okay, then no tent.
뭐? 뭐라고? 노텐트? 텐트 없다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짐을 싸던 우리에게 J가 별안간 별을 보고 싶냐고 했고, 그렇다고 답했을 뿐인데 우리는 텐트 없이 잠을 자는 게 되었다. 하긴 텐트 안에 있으면 별이 안 보이기야 하지. 살짝 당황했지만,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정신없이 나온 우리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사막에서 텐트 없이 밤하늘을 보며 자는 것도 얼마나 낭만적이고 멋진 경험인가 생각도 했다. 출발 전부터 노텐트 선언과 함께 업다시피 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가방까지 걱정되는 것 투성이었지만, born and raised in California (캘리포니아에서 나고자란 사람) 인마냥 의연하게 굴었다. 그리고 어차피 하룻밤인데, 뭐!
J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Joshua Tree National Park의 입구까지 약 두 시간 정도를 갔다. 원래는 가이드를 제외하고 9명의 학생들이 함께 가는 여행인데, 당시 중간고사 기간이라 그랬는지 당일에 돌연 5명이 나타나지 않았고, 나와 내 룸메 두 명, 그리고 인도계 대학원생 한 명이 함께하는 소규모 여행이 되었다. 함께 간 대학원생은 캠핑을 워낙 좋아하는 분이었고, 학교에서 봄방학 기간에 한 9박 10일 그랜드캐년 캠핑도 다녀오셨다 했다. 그 말인즉슨, 이런 야생에서의 캠핑이 익숙하지 않은 건, 나를 포함한 한국인 세 명뿐이라는 것. 국립공원의 초입에 도착하고 우리는 우리의 몸만 한 가방을 업은 채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J와 E가 앞장섰고, K가 뒤를 맡았다. E는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운 런던 소녀였는데, 아주 작은 체구로 산을 타는 모습이 날다람쥐를 떠오르게 했다. E는 조잘조잘 쉴 새 없이 J와 이야기를 하며 그 가파른 산을 쉽게도 올랐다. 반면 우리는 하이킹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말을 잃었다. 하이킹 코스가 어렵고 가방이 무거운 건 둘째 치더라도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실 올라가다 너무 덥고 지쳐서, 진짜 짧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하고 간절한 목소리를 내봤었다. J와 E가 나누는 대화에 완벽하게 묻혔지만, 다시 물어볼 힘은 없었다. 다행스럽게 중간중간 water break(목을 축이는 짧은 쉬는 시간)를 가졌고, 그때마다 난 등에 업힌 가방을 거의 내던졌다. 분명 무거운 건 J와 E, 그리고 뒤에서 묵묵히 걸어오던 K가 다 들고 있는데 가방을 가장 먼저 벗는 건 언제나 우리였다.
-우리 얼마나 더 가면 돼?
-음, 글쎄? 사실 여기도 나쁘지는 않은데, J랑 내가 더 좋은 자리를 찾는 중이야. 여긴 좀 땅이 기울어져 있어서.
산을 오르던 중에 E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정해진 캠핑 장소가 있고, 그곳을 향해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삼십 분 정도를 더 걸었는지, J와 E가 멈춰 섰고 우리에게 이곳이 어떠냐며 의견을 물었다. 캠핑 초짜인 우리는 봐도 뭐가 좋은지 몰랐기 때문에 그저 좋다고만 대답했다. 풀숲 뒤편에 살짝 가려진 땅이어서 바람이 심하지 않을 거고, 편평해서 잘 때도 불편하지 않을 거라 했다. K는 조금 더 뒤쪽 자리를 보고 온다며 훌쩍 언덕을 넘었고, 함께 온 인도계 대학원생도 주변을 둘러보겠다 했는데, 우리는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여기나 저기나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다. 어찌어찌 장소를 정하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득한 정신을 붙잡고 간식으로 싸온 건망고를 먹으면서 당을 보충하는 중이었는데, E가 가방에서 갑자기 은색 모종삽을 꺼내 들었고, 두루마리 휴지와 함께 잘 보이는 곳에 두겠다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우리의 표정을 확인한 J가 부가설명을 시작했다. 화장실이 없으니까, 큰일이 보고 싶으면 조용히 저 도구들을 챙겨서 땅을 파고 볼일을 본 뒤 뒤처리는 출발 전 나눠준 갈색 봉투에 각자 하면 된다고.
아, 세상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제발 내일 돌아갈 때까지 내 장이 얌전하게 버텨주기 바란다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