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현장 에세이 [12.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LIFE의 모토
16년 차 직장인. 지독하게 평범한 윌터의 일상 속, 유일한 탈출구는 '상상 멍 때리기'이다. 무례한 상사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는 상상, 불길 속에서 강아지를 구출하는 영웅적인 상상. 하지만 상상에서 깨어난 현실의 그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멍 때리는 사람’ 일뿐이다.
우리의 일상도 윌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의 모니터 앞에서, 출근하는 지옥철, 교통체증 속에서, 혹은 현장의 먼지 섞인 공기와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우리도 수없이 상상한다. ‘일을 그만두고 세계 일주를 떠난다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한다면’ 같은 것들을 말이다. 하지만 상상은 결국 수많은 현실적인 이유로 상상에 머문 체 현실이 되진 못한다.
오늘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통해 작은 용기, 작은 한 발자국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잡지사 LIFE의 폐간을 앞둔 어느 날,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보낸 마지막 표지 사진 '인생의 정수'라고 불리는 25번 필름이 사라진다. 디지털 잡지로 개편되며 정리해고의 분위기의 칼날이 서늘한 매일매일이 사람들의 목을 조여 오는 날들. 결국 월터는 25번 사진을 찾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회사 문밖을 나선다. 사진 속으로만 보았던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그리고 히말라야로.
필름으로 영화를 배워 전역 후 디지털을 접하고, 이제는 AI까지 익혀야 하는 급변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월터가 느끼는 해고의 압박은 사실 낯설지 않은 동질감으로 다가온다. 16년간 몸담았던 직업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여태껏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의미가 상실되는 슬픔을 저 또한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망설임 끝에 시작된 월터의 여정은 스펙터클 하다.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고 화산 폭발을 피해 질주하는 그 순간부터, 그의 고질병이었던 ‘상상 멍 때리기’는 자취를 감춘다. 지독하리만큼 평범했던 월터의 하루들이, 비로소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강렬한 순간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모히칸 머리에 스케이트를 타던 자유로운 소년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평범하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그랬던 그가 드디어 내디딘 한 발자국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오랜 시간 억눌러왔던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마주하는 과정이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주셨던 여행수첩을 시작으로 25번 필름을 찾아가는 월터의 여정은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과 꼭 닮아있다. 영화는 광활한 대자연 속에 뻗어 있는 수많은 길을 보여준다. 그 길 위에서 인간은 그저 작은 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작은 점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풍경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어쩌면 일탈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익숙한 골목을 벗어나 보지 못한 길로 접어드는 순간, 스마트폰 속의 가상 세계보다 눈앞의 햇살과 바람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런 감각. 늘 가던 카페가 아닌 낯선 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현실'은 조금씩 상상의 영역을 기분 좋게 침범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영화의 후반부, 월터는 마침내 숀 오코넬을 만난다. 하지만 숀은 가장 완벽한 순간을 앞에 두고도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그저
"가끔은 찍지 않아.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거든. 그냥 이 순간에 머무는 거야"
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 월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인생의 정수(25번 필름)'는 숀이 선물한 지갑 안에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숀은 말한다. '안을 봐'라고 이야기했다고. 지갑 안에 '인생의 정수' '25번 필름' 이라니. 머리를 '탁' 하고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항상 멀리 보고 꿈이든, 목적이든 이루기 위해 달려가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살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마주한 25번 필름은 엄청난 마스터피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16년 동안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필름을 현상하던 월터의 성실함이자, 가장 대단한 누군가의 인생을 담아낸 순간이었다. 상상은 현관문을 열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거창한 세계 일주가 아니더라도, 지금 내 앞에 놓인 업무의 스트레스나 변화하는 기술에 대한 공포를 잠시 내려놓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인생의 목적은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된다.
이번 12화에서 함께 나눈 월터의 여정은, 사실 우리 모두가 매일같이 겪고 있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에 대한 작은 위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콘텐츠 시장의 급변하는 물결 속에서, 우리는 종종 "내가 해온 일들이 의미가 있을까?" 혹은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월터가 사라진 25번 필름을 찾아 히말라야까지 날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손에 잡히지 않는 '완벽한 정답'을 찾아 늘 먼 곳을 배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던진 반전처럼, 가장 위대한 가치는 화려한 모험 그 자체가 아니라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 순간의 용기'와 '16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버텨온 성실함'에 있었습니다. 숀 오코넬이 지갑 속에 숨겨두었던 25번 필름의 주인공이 결국 자기 일을 사랑했던 월터 자신이었던 것처럼 말이죠.
혹시 여러분도 보이지 않는 25번 필름을 찾느라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계시지는 않나요?
때로는 셔터를 누르지 않고 그저 풍경을 응시하던 숀의 여유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퇴근길, 늘 가던 길이 아닌 낯선 골목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상상은 조금씩 현실이 될 준비를 마칠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정수'가 되는 마스터피스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25번째 필름은 어디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