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나의 치사함에 대하여
김원석 감독님의 《나의 아저씨》가 나를 평온에 이르게 한다.
박해영 작가님의 《나의 아저씨》가 나를 추앙해 주는 듯하다.
특히 12화 기훈(송새벽)과 유라(권나라)의 장면은 매번 나를 멈추게 한다.
기훈
10년 전에 너랑 찍던 그 영화, 찍으면서 알았어. 망했다. 큰일 났다. 찍어서 걸면 100% 망한다.
난 재기도 못 할 것 같았어. 난 그냥 어쩌다 천재로 추앙받는 거라는 거 알았어.
어, 근데 천재이고 싶었어. 천재로 남고 싶었어, 다시는 영화 못 찍고 굶어 죽어도 천재로 남고 싶었어.
그래서 네 탓하기로 한 거야.
내가 구박하면 할수록 네가 벌벌 떨면서 엉망으로 연기하는 거 보면서 나 안심했어.
더 망가져라 더 망가져라. 그래서 이 영화 엎어지자. 내가 무능한 게 아니라 쟤가 무능해서 그렇다.
반쯤 찍은 거 보고 제작사가 엎자고 했을 때 안심했어.
사내 새끼들도 치사한 게 당할 애 알아봐 조지면 망가질 애 알아본다고.
너 찍혔어 그 새끼한테 희생타로 찍혔어. 왜 거기서 찍혀. 조지면 대들어. 바락바락 대들고
그냥 확 물어버려. 그때 네가 나한테 대들고 찍어 눌렀으면 나 이 지경까지 안 왔어.
내가 너한테 그렇게 하고 치사빤스 같은 내가 너무 싫어서, 그냥 내가 스스로 알아서 망가져 산 거야.
망가지자. 벌주자. 치사한 박기훈 이 세키. 그래서 여기까지 굴러온 거야.
긴 기훈의 대사가 끝나고, 이어지는 드라마 속 유라의 대사는 더 가관이다.
유라
어이없어라, 지금 내 탓하는 거예요?
이 구구절절한 치사함 속에서도 기훈은 유라를 탓한다.
그렇다. 이 장면이 매 순간 나를 멈추게 하는 건, 이런 우리 모두의 치사함 때문이다.
우리의 치사함에는 각자만의 그럴싸한 이유들이 있으니까.
또 그런 치사함을 서로가 시원하게 욕하고, 비난하지 못하는 건, 겪어본 사람은 아니까.
그 치사함들이 각자 살기 위한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걸 아니까.
지금 이 순간, 치사함을 합리화를 하는 나조차도 치사하게 그럴싸한 이유를 찾고 있다.
말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는 스스로 합리화한 저마다의 이유로
기훈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며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다고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남 탓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극 중 기훈은 화를 참지 않고 바로 표출해 낸다.
알량한 자존심이던, 자격지심이던, 부끄럼이 없는 인간이던, 기훈의 화는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싫은데 좋은 척, 예의 바른 척, 척. 척. 하는 이유로 내 감정을 상대에 맞추어 소진하는 나보다
기훈이 차라리 덜 치사한 인간이다.
"아버지처럼은 절대 안 살아"라는 어느 드라마들의 대사처럼 살아온 나의 20대는
혼자만의 아우성일 뿐, 결국 아버지의 그림자를 닮아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하얗게 세어가는 머리카락의 속도도, 평생 파마는 할 필요 없는 곱슬머리에
심지어 같은 질병까지. 싫어하면서 끔찍이도 닮아간다.
서로 너무 닮아서, 그래서 서로가 버거운 그 시기에 나는 불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느덧 3년의 시간을 교류하고 있지 않은 지금, 그 시작은 어쩌면 부모와 자식 간에도
'모욕'과 '비난'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는 하지 말아야 된다는, 또 나만의 그럴싸한 치사함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아직 우리 부모님은 나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에 이유를 모르실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의 치사함은 굳이 변명하자면 내가 살아있어야 자식 된 도리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나 나름의 생존본능의 이유도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너를 보면 망한 사람 같지가 않아'라는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남들을 의식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한 척 나를 채찍질해 왔다.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차도로 향해있어 스스로 놀라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술 취한 어느 밤, 태어나 처음으로 '죽고 싶다'라는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와,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순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찌질하고 겁 많은 겉으로만 센 척하는 겁쟁이라는 것을.
'항상 취해있어야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이런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매일 취해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고장남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철저하게 잔인한 것보다는 차라리 착한척하는 게 낫다.
무엇인가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잔인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과거의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상황. 내 숨이 당장 막힐 것만 같은 상황들이 눈앞에 찾아온다.
그런데 차라리 잔인한 것보다는 차라리 착한척하는 게 낫다니. 잔인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걸까?
라는 삐뚤어진 내가 고개를 든다. '잔인해지겠다'라고 매번 다짐하지만, 나의 어설픈 착함은 스스로 더 괴롭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그래, 착한척하는 게 낫다니까...' 나는 오늘도 잔인한 다짐만 할 뿐,
잔인해지지 못해 스스로 괴로워한다. 괴롭고, 불신하고, 불만족하는 나의 회색 같은 하루들이, 비비드 하고 알록달록했던 내 세상을 탁하게 만들고 있는데, 고장 나고, 망가진 건 맞는데,
그게 또 잔인함과 착함과는 뭔 상관인지..
여기에도 또 나는 나만의 이유가 있다고 치사하게 내 하루들을 지나 보낸다.
나의 아저씨도, 나의 치사함도, 처음으로 내뱉은 죽고 싶다는 말도, 잔인함과 착함도.
흐름도, 맥락도, 연관성도 없는 이 의식의 흐름들 속에 무작정 가져다 붙인,
나만의 그럴싸한 이유들이. 나를 치사한 인간으로 만든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나도, 너도, 우리는 모른다.
또 우리도, 너도, 나도 매일 그럴싸한 치사한 이유들로
'내가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스스로 자위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망가져가는 중인지, 스스로 벌을 주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으나
《나의 아저씨》 중 기훈처럼, 나만, 너만, 우리만 안다. 내가 얼마나 치사한 새끼인지.
기훈
내가 한 번 안아줘도 되냐. 내가 눈물 난다. 나 보는 거 같아서. 그러지 말자, 괜히 애 잡고 그러진 말자.
너 왜 그러는지 알아. 진짜 안다고 나는. 아니 더 깊이 내려가 봐.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 안다고, 너하고 나만 안다고.
우리가 얼마나 치사한 새끼인지.
그렇게 오늘도 나는 치사하게 사부작사부작 써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