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6:2021.06.14 '돈오(頓悟)'의 의미>

그저 운좋게 반짝였던 나의 가짜 '돈오'에 대하여

by IMMM


I. 세 번째 다시 읽는 ‘인문학 나침반’

요즘 인문학 책들을 많이 읽게 된다. 그리고 새 책보다는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랜만에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박웅현 작가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이 책은 나에게 인문학에 있어 일종의 나침반 같은 존재다. 인문학이라는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 이 책이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같은 업종의 선배인 박웅현 작가가 걸었던 길들이 궁금해서 접하게 된 이 책은 만난적도, 같이 일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느낌이 그냥 좋았다. 첫 페이지 왼쪽 한켠에 있는 그 세련된 지성인이 풍기는 분위기를 닮고 싶었다. 총 348페이지의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따라가 보았다. 3번째 다시 꺼내 읽은 348페이지는 무려 45일이 걸렸다.


II. 과거의 나의 '돈오'는 지적 허세였을까?

총 8개 강의로 이루어진 책의 마지막 8강에서 '돈오'와 법정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었다. 문득 나에게 '돈오(頓悟)'는 무엇이었을까? 고민이 되었다.


돈오(頓悟):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을 일컫는 불교의 용어.


인문학에 있어 이 책이 나에게 돈오였다고 생각했었다. 단번에 깨달았다고 자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 책은 나에게 나침반 같은 느낌이지 '돈오'는 아니었다. 사람도 만날수록 매력이 짙어지듯, 음식도 씹으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지듯, 모든 새로움은 사실 지날수록 그 가치가 깊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즉 한 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과거에는 다독(多讀)이라는 지적 허세에 매일 새 책을 사서 읽기만 했을 뿐, 책에서 그 무엇도 깨닫지 못한 체, 책들은 그저 책장 속 인테리어로 전락하고는 했다. 심지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들도 수두룩했다. 책 속에 소개되는 책들을 읽어본 적도 없는데 이 책이 나에게 인문학을 깨닫게 해 준 '돈오'라고 생각했다니... 이런 허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책을 사기 보다는 혹시 내가 놓쳤던 그 날의 '돈오'들이 내 책장 어딘가에 잠들어 있지는 않을까 다시 꺼내 읽기 시작하는 듯 하다.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자만했던 나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지금 나의 바닥이 어디인지 확인 하 듯 끊임없이 아래로 치닫고 있다.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라 생각해 본다.


III. 진짜 '돈오'는 점진적인 과정의 보상

지난 시간을 다시 들추어본다. 쌓인 먼지를 털어본다. 그리고 단번에 깨달음을 주었다고 착각했던 그 시간을 되짚어본다. 호기심과 궁금증, 허세와 자만이 가득했던, '돈오'라 여겼던 나의 시간은 사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그저 운좋게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돈오'란 최소한의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충분한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늦었지만 언젠가 진짜 찾아올 나의 '돈오'를 맞이하기 위해 이제서야 그 시간들을 보낼 준비를 한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의 '돈오'가 찾아왔을 때, 부디 진짜 '돈오'의 의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길 바래본다.


이 사부작사부작도 언젠가 깨달음의 순간이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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