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운좋게 반짝였던 나의 가짜 '돈오'에 대하여
요즘 인문학 책들을 많이 읽게 된다. 그리고 새 책보다는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랜만에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박웅현 작가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이 책은 나에게 인문학에 있어 일종의 나침반 같은 존재다. 인문학이라는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 이 책이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같은 업종의 선배인 박웅현 작가가 걸었던 길들이 궁금해서 접하게 된 이 책은 만난적도, 같이 일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느낌이 그냥 좋았다. 첫 페이지 왼쪽 한켠에 있는 그 세련된 지성인이 풍기는 분위기를 닮고 싶었다. 총 348페이지의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따라가 보았다. 3번째 다시 꺼내 읽은 348페이지는 무려 45일이 걸렸다.
총 8개 강의로 이루어진 책의 마지막 8강에서 '돈오'와 법정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었다. 문득 나에게 '돈오(頓悟)'는 무엇이었을까? 고민이 되었다.
돈오(頓悟):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을 일컫는 불교의 용어.
인문학에 있어 이 책이 나에게 돈오였다고 생각했었다. 단번에 깨달았다고 자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 책은 나에게 나침반 같은 느낌이지 '돈오'는 아니었다. 사람도 만날수록 매력이 짙어지듯, 음식도 씹으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지듯, 모든 새로움은 사실 지날수록 그 가치가 깊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즉 한 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과거에는 다독(多讀)이라는 지적 허세에 매일 새 책을 사서 읽기만 했을 뿐, 책에서 그 무엇도 깨닫지 못한 체, 책들은 그저 책장 속 인테리어로 전락하고는 했다. 심지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들도 수두룩했다. 책 속에 소개되는 책들을 읽어본 적도 없는데 이 책이 나에게 인문학을 깨닫게 해 준 '돈오'라고 생각했다니... 이런 허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책을 사기 보다는 혹시 내가 놓쳤던 그 날의 '돈오'들이 내 책장 어딘가에 잠들어 있지는 않을까 다시 꺼내 읽기 시작하는 듯 하다.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자만했던 나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지금 나의 바닥이 어디인지 확인 하 듯 끊임없이 아래로 치닫고 있다.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지난 시간을 다시 들추어본다. 쌓인 먼지를 털어본다. 그리고 단번에 깨달음을 주었다고 착각했던 그 시간을 되짚어본다. 호기심과 궁금증, 허세와 자만이 가득했던, '돈오'라 여겼던 나의 시간은 사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그저 운좋게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돈오'란 최소한의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충분한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늦었지만 언젠가 진짜 찾아올 나의 '돈오'를 맞이하기 위해 이제서야 그 시간들을 보낼 준비를 한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의 '돈오'가 찾아왔을 때, 부디 진짜 '돈오'의 의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길 바래본다.
이 사부작사부작도 언젠가 깨달음의 순간이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