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본업은 사고처리 5

북조선 아랍어

by 임모씨

태국기사 사건 담당 법원의 소재지는 Qasr Al Khiyar라는 작은 도시였다.

직역하면 '오이의 성'인데, 오이로 만든 성채가 있었는지 아니면 오이가 엄청 많이 나는 도시인지모를 묘한 이름이었다.

리비아인들의 식품 구매 영수증을 전담처리해주는 일을 하기에 아랍어로 야채이름은 다 꿰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주변 리비아인들에게 물어봐도 자기들도 모른단다.


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순서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별의별 사람들이 와서 말을 걸든가, 변호사랍시고 명함을 주던가 하는데, 그들 중 한 특별한 만남이 아직까지 기억이 남는다.


한 동양인이 아랍어를 리비아인들보다 훨씬 잘하는것처럼 보이는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곁가지로 훔쳐봐도 마치 아랍어 방송에서 나오는 표준아랍어를 동양인 얼굴을 하고 리비아인들을 압도하는것이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과 말투, 간간히 리비아 사투리도 써주면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것 같았다.

그 사람도 나를 의식하고 있는지 간혹 곁눈을 주면서도 중요해보이는 그 대화를 계속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나긴 기다림에 지쳐서 만사 다 귀찮았던 상황이었는데 그 사람의 등장으로 흥미와 긴장으로 지루함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오는데 우리 일행의 행색은 누가봐도 대수로공사 관련인원이었지만 저사람은 우리가 누군지 알 수 없었으니 내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대뜸 하는 이야기는 '깔람이십네까?' 였다. 즉, 아랍어 사원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이미 나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고 나도 본능적인 반사신경으로 손을 내밀어 잡았다.

나의 습자지보다 얄팍한 실력이 이미 들통난듯하여 (이미 이사람은 내가 어떻게 법정에서 하는지 봤을지도 모른다.) 잔뜩 주눅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 주시라요.' '동포끼리 도우며 삽시다' 라는 말들을 의기양양하게 하며 바쁜일이 있는지 서류뭉치가 가득든 가방을 챙기며 자리를 떴다.


그는 북한사람, 그리고 아랍어 전공자였다. 그리고 리비아에 파견되어 나와 같은일(?)을 하는 아저씨였다.

나는 동아잠바떼기에다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 아저씨는 넥타이 없는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뽀마드까지 머리에 바른 깔끔한 인상이었다.

우리 둘의 외양만 보면 막 역전되기 시작한 남과북의 체제경쟁이 여기서는 반대로 보이기도 했을것 같다. 깔쌈한 북한 아저씨와 추레한 남한 노가다 꼬맹이.



우리는 아랍어-한국어 사전을 우리 교수님께서 편찬하신것을 사용했다. 우리가 학창시절 사용했던 문방구에서 파는 영어 단어장을 물에 담아놓고 닷새 정도 뿔린 것 같은 볼륨을 가진 그런 열악한 수준의 단어장이 그래도 우리가 공부하는데 유일하게 도움을 주는 그런 고마운 자료였다. 하지만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 몇몇 선배들이 '어디서 좋은거' 하나 들고와서 그걸 복사해서 제본해서 쓰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에 뿔려놓은 단어장이 아닌 정식 사전이었다. 그것도 아랍어-영어도 아니고 아랍어-한국어 사전!!!


그시절은 저작권등의 고급스럽고 달달한 개념은 개나줘버린 야만의 시대! 우리 불법 복사물 사전은 우리끼리 불법 복사 및 제본되어 공동구매품목으로서 절찬 판매되어 우리 공부와 아랍어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그건 어디서 온것일까? 바로 북한에서 만든 사전이었다!!

두꺼운 볼륨과 풍부한 예문을 자랑하는 정말 쓸만한 사전이었는데 중요한 단어를 설명하는데 아낌이 없었고, 특히나 북한의 주체사상의 내용이 예문으로 쓰여있어 발견한 우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유시민작가의 '꺼꾸로읽는 세계사' 종류의 책만 들고 있었어도 검문에라도 걸리면 전경 뻐스에 끌려가서 재수없으면 꿀밤을 맞거나 훈계를 듣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학생이라는 거짓말을 해야 겨우 풀려나는 드러운 하루를 겪었던, 그 시절에 북한의 저작물을, 그것도 주체사상이나 김일성동지를 찬양하는 선전선동 문구나 미 제국주의자들을 죽탕치는 갖가지 표현들을 그대로 살벌한 아랍어로 예문을 들어주는 그 국가보안법 위반급의 간큰 공부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나중에 다시보면 표지 다음장에는 아랍어-한국어 사전대신 '표준아랍어-조선어 사전' 이라고 쓰여있었던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서적이었다.

만약 걸렸다면 큰 간첩단 조작사건 하나쯤은 안기부에서 쉽게 만들어낼만한 폭탄이었는데 우린 아무생각없이 낄낄거리면서 북조선 아나운서 목소리를 흉내내며 읽기도 했고, 아랍어로도 읽어보기도 했었다.


그런 수준높은(?) 학문적 성취는 평양외국어대학교에서 이루어낸 것이었는데, 북한의 엘리트중의 엘리트가 들어가는 학교라고 한다.

미리 성분좋은 아이들을 선발해서 시리아같은 우호국에 어렸을때부터 유학을 보내고 가다듬은 아이들이 입학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외국어는 부족한 외화를 벌어오는 수단이자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 때문에 그 학생들은 얼마나 목숨걸고 외국어를 익혔을것인가?

그런 그들의 눈에 태국-리비아-한국 드림팀의 실시간 코미디가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에게 그렇게 우호적인 악수를 선뜻 내밀어 준 배경에는 이미 압도적인 실력차이를 확인 한 후 였을것이니 그가 보여준 미소에는 반가움보다는 자신감이 앞서 있었을것이다.


내가 있을시기 리비아엔 많은 북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건설, 여자는 간호사로 일한다고 한다. 병원에 방문할일이 많았는데 가끔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목격하기도 했었다. 여자를 보기가 좀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여러가지 이유로(?) 반가워 할라치면 무리지어 가던 하얀가운의 꽃같던 언니들이 호다닥 얼른 다른곳으로 도망가는것을 여러차례 경험했다.


'오이의 성' 법원에서 만난 그 북한 아랍어 아저씨는 아마도 내가 공부했던 그 사전 정식판을 가지고 공부했을것이다. 어쩌면 그 사전을 가지고 함께 같은 언어를 공부한 그 인연이 굳이 리비아에서 우연이 겹쳐 만남으로 이어진 듯하다.


그아저씨를 보고 통일되면 아랍어배운놈들은 굶어죽겠구나 생각하기도 했는데, 굶어죽어도 상관없으니 내 죽기전에 통일이 된다면 그 '깔람사원' 한번 만나서 함께 지냈던 리비아의 옛날 시절 이야기를 나눠보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하는 낭만 넘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전 21화EP6 본업은 사고처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