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은 나의힘
사고이후 유가족과 어르신들과 친분을 쌓은 나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꼭 놀러오라는 인사치레를 그냥 넘기지 않고 진짜로 놀러가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처음엔 샤리프 알리 아저씨와 같이 갔던 기억이 나고 다음엔 우리 리비아 기사와 함께 그냥 놀러갔다.
물론 빈손으로는 가지 않고 그들이 좋아할만한 커피나 문구류 같은 것들을 갈때마다 드리곤 했다.
처음 어르신을 방문했때에는 차나 얻어먹고 물품이나 드리려 했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기왕이면 밥도 얻어먹으면 좋겠다는 막연하고 염치없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화도 없었던 동네였으니 미리 연락을 드리고 약속을 잡고 하는것은 사치였고 무작정 방문한 우리 일행을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우리를 거실로 안내한 어르신이었다.
집안의 아이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킨후 한참이 지나도 어르신은 돌아오지 않는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왜 안오시는지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샤리프 알리 아저씨의 대답은 '너를 대접하겠다고 양을 잡고 있단다' 였다!! 놀란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 만류하려 하는데 아저씨는 나를 말리면서 그냥 냅두라고 말하며 '거절은 곧 죽음이다'라는 농담을 하셨다.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양과 낙타는 우리에게 곧 냉장고, 세탁기이자 자가용의 가치를 지니는 재산인데 이 어르신은 딸랑 나같은 꼬맹이 방문자를 위해 산와머니에서 천만원을 빌리는것 같은 무모한 접대를 하시는것이었다.
한시간이 넘는 기다림끝에 잘 차려진 양고기와 쌀요리를 앞에두고 너무나 감격한 마음을 내 앞에 먹을만한 부분을 넘어 아저씨의 영역까지 먹어치워버리는 초인적인 폭식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그들의 접대에 대한 최고의 상찬을 보여드렸다.
나는 어느 나라를 가서도 그들이 대접한 음식들을 꿀떡꿀떡 잘먹어서 많은 칭찬을 받곤 했었다. 심지어 몸에 무리가 와도 내가 가진 양의 1.5배에서 2배를 먹어야 나에게 보여준 성의를 돌려드리는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손님을 접대하고 남은 음식은 그날 식구들의 음식이 되는것을 몰랐는데, 내가 아마도 꼬맹이들 두명분의 음식을 더 축냈을것이다.
터질듯한 배를 쓰다듬다가 어르신이 너무나 좋아하시는 이슬람학 개론을 서로 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날을 마쳤는데, 그 어르신은 나중에 우리 캠프에서 다 떨어진 '설탕'이니 '누룩'이니 '대추야자'등과 같은 잡다구리한 것들을 얻기 위해 방문할때면 늘 한결같이 양을 그렇게 잡으려 하셨다. 물론 이번엔 한사코 만류하고 도망다녀서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지만 어르신이 가지고 있지 않던 물품은 동네 다른 아저씨에게 같이 구하러 다니고 다른 아저씨들도 어르신과 비슷한 분위기로 나를 환영해주셨다.
물론 어르신도 역시 내 손을 잡고 앞에서 끌고 가는것은 샤리프 알리 아저씨나 주방장 압둘라아저씨와 다르지 않았다.
길가다 마주치는 동네 꼬마놈들과도 인사하고 머리한번씩 쓰다듬고 지나가고 멀리서 보고있던 청년들과도 손을 들어 인사한번씩은 하고 다녔던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동네 마실나갈라치면 그 작은 시골마을을 한번씩 흝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것 같다. 물론 차와 음료, 그리고 과자부스럭지들을 많이 얻어먹고 그날은 캠프에서 저녁은 가뿐히 건너뛰고 바로 휴게실로 갈 수 있을 컨디션이 되곤했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2주일에 한번 돌아오는 금요일에 쉰다. 이슬람권 휴일인 금요일엔 아무 할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날을 기다렸다가 시내(?)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오거나 전화국이라고 불리우는 문짝없는 텅빈가게에 책상두개와 다이얼 전화기 두대가 있는곳으로 가서 가족과 통화를 하곤 한다.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주면 전화국장으로 보이는 리비아 아저씨가 적힌 번호로 다이얼을 돌린후 누군가 받는 기척이 들리면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수화기를 넘겨주는 시스템으로 지극히 원초적인 미니멀리즘 방식으로 가족과의 희미한 끈을 이어갔다.
그마저도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줄서서 기다리고 긴통화는 눈치가 보이니 금방 생사확인 수준으로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야하는게 그곳의 룰이었다.
통화한 시간과 나라를 자기네 나름의 국가구분이 있는지 가격도 국장님(?)이 정해준 가격을 통화후 현금지불을 해야한다.
그 사건이후였다. 우리 무뚝뚝한 국장님은 뒤에서 줄서있는 나를 알아보더니 또 손을 잡아끌고 막 통화가 끝난 필리핀 근로자가 떠난 자리에 앉히고 나에게 전화번호적을 메모지를 내밀었다.
미리 줄서있던 내 앞에 근로자들이 놀라움과 띠꺼움을 담은 레이저를 내 뒷통수에 쐈겠지만 여기선 리비아사람이 왕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니 감히 누구하나 나서서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아마도 전화국장 아저씨도 그날 함께 있었던것 같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돈을 지불하고 감사함을 표현한 후 전화국(?)을 나와 담배를 물기위해 짝다리를 짚고 있는데 국장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고는 내가 낸 돈을 다시 내 두손에 꼭 쥐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면 안된다고 다시 돌려드렸지만 국장님의 대답은 '형제에게는 돈을 받을 수 없다' 였다.
다른사람들이 있어서 그 앞에선 돈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까지 말했다.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더이상 그분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된다 싶어 그날은 그냥 물러났지만 다음부터는 전화통화후 담배를 피지않고 얼른 도망가는 방법으로 난처함을 회피했다.
어쩌면 읽는 사람들에게 '구라가 심하네'라고 느낄수 있을것 같은 비현실적인 낭만과 그 인류애가 차고 넘쳤던 일들을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30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을때도 있긴하다.
그 동네에서 처음에는 이방인 가해자로 첫발을 딛었지만 어느새 동네에 나름 '유지'같은 느낌으로 내 살던 한국의 동네보다 더 편하게 다니는 곳이 되어버렸다. 막말로 배고프다고 아무데나 문을 두드려도 밥을 얻어먹고 재워달라면 재워주고 심심하면 놀러가서 놀다올 수 있는 사막의 고향을 나는 그곳에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