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비효율적이고 산만하지만
어릴 때부터 꿈을 좇는다는 메시지의 광고가 싫었다. 궁금한 마음에 자기 개발서 펼쳐봤다가 빠르게 내려놓았던 스무 살 때 심정과 비슷할까.. 오글거림은 둘째치고 볼 때마다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싫어하던 소위 ‘꿈 광고’는 보통 청춘남녀들이 환하게 웃으며 뛰고 있고 (이때 이들의 얼굴은 무조건 하얘야 한다. 검게 탄 얼굴은 안된다) 맑은 하늘이 비치면서 '꿈을 향해 열정적으로 사는 우리 존재 화이팅 할 수 있어’ 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일본 리쿠르트 사의 광고나 포카리스웨트 광고 중에 이런 류가 많았는데, 아무튼 볼 때마다 괜히 심술 맞아진 스스로를 느끼곤 했다.
뭐가 그렇게 불편했을까. 아마 그때 당시 나는(물론 지금도) 그렇게 좇고 싶은 꿈도 딱히 없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열정도 없는데 마치 그런 삶이 바람직한 것 마냥 그려내는 모양새가 알게 모르게 부담스러웠나 보다. 왜 꼭 꿈이 있어야 하고 왜 그걸 좇으며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지, 그게 어떻게 좋은 거라고 할 수 있는지.. 사실 이건 아직까지도 나에겐 어려운 영역이다.
오히려 나는 요즘 들어 그 반대를 더 생각한다. 서른이 넘어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건 인생을 더 허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허비한다는 것이 망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 당장의 정량적인 목표 없이, 비록 비효율적이고 산만할지라도 그 나이 그 시간대의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에 나를 더 마음 편히 푹 담가둘 수 있었다면. 여태 별생각 없이 공부하고 스펙 챙겨서 취직했지만, 효율적으로 착착 움직여 내가 챙긴 것들은 결국 껍데기로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요즘이다.
최근 들어 조금 늦게나마 시간을 잔뜩 비효율적으로 허비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시간들을 통해 예전보다 나 스스로의 심지가 훨씬 단단해진 느낌이다. 디자인도 배우고, 디제잉도 하고, 프리다이빙도 하는 등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충실하게 빠져있는 순간들을 늘리며 내면이 조금씩 더 견고해졌달까.(원래는 심지가 아예 없는 수준이었던 걸까?) 순수한 ‘그냥 하고 싶음’에 시간을 잔뜩 낭비한 나날들이 오히려 내가 듣는 각종 조언과 충고 - 나중에 결혼하려면.. 집을 사려면..- 들에 잠식되지 않고 여전히 나로서,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결국 나만 좋으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꾸준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산만하게 추구하면서 살 테다.(산만함은 고쳐보고 싶은데 이것은 신의 영역..) 최단거리도 아니고 정상을 향한 방향도 아니지만, 이게 결국 나만의 호흡이고 방법이니까. 내가 기피하던 ‘꿈 광고’의 방향과는 달라도 상관은 없다. 그리고 그 꿈을 그려내는 방식도 앞으로는 분명 변화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남은 인생도 더욱 허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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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도 그의 에세이에서 말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고. 채소 말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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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 박완서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