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친구가 불쑥 카톡으로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허준이 교수(한국계 수학자 중 처음으로 필즈상 수상)가 졸업식 축사를 했는데 한번 보라며. 으, 수학자의 말이라니... 벌써부터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논리와 이성의 끝판왕 격인 수학과 영 맞지 않다며 어릴 때부터 선을 그어온 나는 이번에도 얄짤없이 선을 그었다. 고마워, 시간 나면 한번 볼게.
얼마 후 그 친구와의 카톡방을 열었다가 그 링크를 다시 발견한다. 못 본 척 넘기려다가 흠, 사실 아무거나 공유하는 친구는 아닌데. 한번 읽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는다. 얼얼하다. 내가 본 어느 축사보다도 아름다웠다. 충격적인 것은 수학이 '모순이 없는 한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하는, 생각보다 독창적이고 너그러운 학문이었다는 것이다. 축사의 메시지 또한 ‘모순이 없는 한 자유롭게 삶을 탐구할 것’. 한 줄 한 줄 곱씹어보았다.
며칠 전, 여느 때처럼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다른 팀원이 아이디어를 먼저 발표하기 시작했다. 앗, 저 아이템. 평범하다고 생각해서 금방 넘겨버린 주제였다. 곧이어 발표해야 하는 나는 슬며시 긴장을 푼다. 아니 그런데 듣고 있자니 그 뻔하다고 생각한 아이템을 풀어나간 방식이 너무 좋다. 뭐야, 좋은데? 늘어져 있던 자세를 나도 모르게 세운다. 나는 왜 이걸 못 살렸지? 나도 분명 생각했던 포인트인데. 정신이 어질해졌다. 내 아이디어는 더이상 생각나지도 않았다.
스스로가 그래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음에도 아직까지 이런저런 벽에 부딪히곤 한다. 수학에 대해 선부터 긋느라 나에게 울림을 줄 수 있을 글을 읽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이미 뻔한 아이템이라는 생각에 갇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켜 볼 기회도 갖지 않았다. 편견에 사로잡히면 본질과는 빠르게 멀어진다. 나의 중심축은 기울고 시야는 뿌예져서 끝내 휘청이게 된다.
가끔은 이게 편견인지, 주관에 따라 맞게 판단한 건지 구분이 잘 안 가기도 한다. 한 친구는 아끼는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굉장히 조심스러워진다고 했다. 요즘은 윗사람이 조금만 잘못 얘기했다간 쉽사리 꼰대 소리를 듣곤 하니까. 어쩌면 나 역시도 윗사람의 애정 어린 시선, 근거 있는 피드백을 꼰대라는 편견 아래 귓등으로 흘려보낸 적은 없었는지. 이렇게 편견과 편견이 아닌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할 때면 자연스레 수학자의 축사가, 나의 놓쳐버린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편견이 별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주관과 잣대는 있고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게 곧 편견이기도 하니까. 살아온 날들이 겹겹이 쌓일수록 나의 주관과 잣대, 그리고 편견은 고개를 한층 더 꼿꼿이 세운다. 이는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업무를 위한 빠른 판단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휘청이다가 수학자를 억울하게도, 스스로를 주눅들게도 만들어 버린다.
편견을 일방적으로 부정할 것도, 할 수도 없다. 다만,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 발전하는 크리에이티브를 꾸준히 만들어내기 위해선 때로는 내 중심축이 많이 기울어 있지는 않은지, 시야가 너무 뿌옇지는 않은지 한 번쯤 점검해볼 일이다. 혼자서 하기는 어려우니 링크를 보내주는 친구나 옆 동료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서.
※ AD-Z 광고계동향 2022 11/12월호(Vol.339)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