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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Aug 14. 2018

오십 줄의 퇴직

죄목, 무직. 나는 모범수였다.


"담배 주세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군대에서도, 대학에서도 입에 대지 않았던 담배를 누군가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구입하다니. 편의점에 나와서는 컵라면을 사지 않을 것을 크게 후회했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뛰쳐나오는 바람에 주머니엔 달랑 오천 원 뿐이었다. 비는 여전히 호기롭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내와의 싸움은 퇴직을 한 순간부터 끝나질 않았다. 아내는 대기업과 결혼했다. 퇴직한 나하고는 남인 것이다. 나는 나와 아내를 이어주던 사랑의 실체가' 대기업'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맞지? 맞네, 정호형!"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뒤에는 달갑진 않지만, 언제가 한 번 궁금했던 고교 동창생이 서 있었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말끔히 올려 주름마저 기품있게 자리 잡은 중후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어? 어. 나야 잘 지내지……. 좋아보인다?" 


묻고 싶지 않았으나 어쩐지 꼭 물어야 할 것 같던 인사치레를 건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 옷이 날개라는 둥, 병원 기술이 좋아졌다는 둥, 자신이 입은 정장이 얼마라는 둥. 마지막엔 눈치를 보다 슬쩍, 이 정장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녀석이 아직도 패션을 고집하고 있을 줄 몰랐으므로 사뭇 당황했다. 그러자 녀석은 패션 디자이너라며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했다.



내가 S대에 들어갔을 때, 녀석은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패션에서 나름 알아주었던 M 대학에 가고 싶다고 재수를 했다. 그 시절 남자에게 패션이란 사회적으로 엄격한 것이었으므로 반 아이들은 그의 꿈을 암묵적으로 비웃었다. 그가 좋은 성적을 두고 M 대학을 위해 재수를 한다고 나섰을 때, 나는 그에게 정신 차리라며 담임선생님과 똑같은 훈계를 뒀다. 나는 그 훈계가 어른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녀석을 훈계하며 잠시 그보다 어른인 것 같은 자만감에 빠졌었다. 당시엔 나 외에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의 인생에 대해 한 마디씩 던졌기 때문에 정도가 지나친 훈계조차 정당하게만 느껴졌는데, 새삼 30년 만에 본 그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빗소리는 거칠었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힘껏 뛰어들었다. 그가 뭐하냐는 질문을 했을 때 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달았던 직급을 얘기했다. 꽤 규모 있는 건설회사의 상무쯤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동지라도 만난 듯 나의 어깨를 반갑게 툭툭 쳐댔다.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진심 어린 녀석의 표정엔 언제 잘리는지,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자식의 대학 등록금에 관한 걱정 따위는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애들 대학 등록금은 어쩌고!'


나는 명예퇴직을 했다. 아내에겐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찢어진 목소리가 귓가를 허청허청 울린다. 죄목, 무직. 가장이었던 나는 한낱 죄인이 되었다. 전교 20등 안팎을 유지하다 S 대학에 들어가, 사고는커녕 술 담배도 멀리하며 대기업에 취직했다. 청춘은 야근으로 보냈으나 전혀 아까워하질 않고, 훌륭한 가장을 목표로 젊음을 기꺼이 노후에 받쳤다. 나는 모범수였다.


'남자는 현실적으로 살아야지.'

30년 전에 내가 녀석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꿈을 살았으나, 그에게 꿈은 현실이었다. 무심코 무릎 나온 운동복에 시선이 갔다. 방심하는 사이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현실적인 나는 현실에 졌는데, 꿈을 꾸던 그는 현실을 이겼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배려하듯 중요한 미팅이 있다며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 연락처는 주고받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맵고 쓴 연기가 입안을 점거한다. 콜록거리며 연기를 지저분하게 토해냈다. 케엑, 캑, 캑, 소리에 따라 튀어나온 연기가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를 필사적으로 헤맨다. 담배 한 개비가 완전히 손에서 사라질 때까지 빗속으로 연기를 뱉고 또 뱉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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