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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Aug 17. 2018

수취인 불명

보고싶은 내 아가에게


아가야. 밤새 눈이 올 작정인가 보다. 후미진 골목에 더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다 떠났다. 세상이 흉흉해진 탓이겠지. 네가 세상에 나오면 조심해야할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어렸을 땐 불투명하게 맑았던 하늘도 이젠 탁하단다. 밤하늘엔 별도 없지. 예전엔 개천에서 용도 났는데 지금은 여의주를 물고 태어난 용들만 승천하는 세상이다. 가난엔 희망이 없다. 아버지가 그 시간, 대리운전을 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


아가야, 네 어머니는 이 새벽에 바나나가 먹고 싶단다. 이젠 네 핑계를 댈 수 없는데 하도 당당해서 못 이기는 척 밤거리를 나섰다. 네 소식을 들은 후로부터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던 중 참으로 다행이지 않니? 

네 어머닌 벌써 이틀 째 공복이다. 열 두 시간을 꼬박 앓느라 진이 다 빠졌을 텐데도 의사만 보면 눈을 부릅뜨고 온 몸으로 진찰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용하다 싶어. 울화가 치밀어도 어쩌겠니. 이 동네에서 가장 값싼 병원은 이 곳 뿐인걸. 의사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데 네 어머니는 비양심적인 세상에 끝까지 저항하는 모양이다.


너를 대신해 태어나는 어느 의원의 아이를 차라리 죽일 요량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어. …예쁘더구나. 너도 저리 예뻤을까. 부걱부걱 끓어오르던 분노가 허망하게 흩어졌다. 그리고는 맥이 풀려 그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지.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울음처럼 대차게 울었다. 너희는 어떤 악연이었기에 태어나기 전부터 권력 아래 경쟁을 한 걸까. 첫경쟁에서 져버린 수치심에 성급히 이번 생을 포기한 거니? 변변치 못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앞으로 닥칠 치욕이 뻔하게 생각되었니?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라. 가진 거라곤 형편없는 9평 남짓의 원룸과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가사도우미 어머니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바나나는 구하지도 못했는데 왼발이 얼었구나. 눈 쌓인 길을 허청허청 쓸며 걸어온 탓이겠지. 아버지가 지나온 눈길은 발자국대신 발 보폭만큼의 길이 나있다.


아가야, 아버진 다른 아버지보다도 당부할 말이 많았다. 아버지는 눈길이나 빗길에선 걷기 싫다고 떼를 써도 안아줄 수 없다. 목마 한 번 태우기 힘든 몸인데, 장난감조차 사줄 수가 없다. 회사는 다리를 핑계로 잘려나가, 그나마 받던 쥐꼬리만한 월급마저 언제 끊길지몰라 늘 대비해야하기 때문에 용돈도 줄 수 없다.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 수도 있어. 절뚝이 아버지와 가사 도우미 어머니를 부끄러워할 지도 몰라. 왜 나를 낳았냐며 선택하지 못한 불행을 탓할 지도 모르지. 네게 재능이 발견되더라도 지원해줄 수 없어서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며 이기적인 바람을 말해놓고, 가정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다른 것들 역시 바랄 거다. 그래도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라, 그래도 성실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에서 손해 볼만한 것들을 인간의 도리라며 가르치겠지. 


이제는 모르겠다. 도리를 지키는 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나 싶어 지키고 싶지 않아진다. 상식이 결여된 사회는 사람다운 사람들만 할 일이 많아졌다. 가진 게 많아서, 가진 게 없어서, 부지런했어야만 하는 인생이었을거다.


아가야, 미안하다. 이 순간에도 네 엄마와 함께 가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파렴치한 아버지를 용서하지 마라. 고작 대리운전을 이유로 떠나는 길을 함께 하지 못한 아버지를 용서하지 마라. 생명을 주어놓고 책임지지 못한 무능력한 아버지를 용서하지 마라. 막막한 절망 속에서 복수는커녕 왜 조금 더 버텨주지 못했냐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아버지를 용서하지 마라.


죄많은 아버지를 선택하지 않은 너는, 참으로 잘했다.

장하다... 장하다, 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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