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다시 립스틱

by 이모리

어제 올리브영에 갔다. 6년 만에 화장품을 샀다.


화장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것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결혼식. 남자들은 30분이면 끝나는데 여자들은 서너 시간에 걸쳐 얼굴과 머리를 공들여 만지는 일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30분이면 둘 다 충분하게, 적당한 아름다움을 갖출 시간인데 여자만 수 시간을 들여야 하는 꾸밈이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분노하는 마음에 화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산 화장품이 2019년쯤에 산 파운데이션이다. 30ml 한 통을 무려 4년에 걸쳐 비우고는, 더 이상 화장품을 사지 않았다.


결혼 후로 여자들의 꾸밈 노동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 남편은 뱃살이 '디폴트'라고 했다. 남편 옷을 입어보면서 옷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허리'라인'을 강조하거나 다리'라인'을 부각하지 않는 옷, 보온이나 속건 등 기능에 초점을 맞춘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허리, 납작한 배, 하얀 얼굴, 찰랑거리는 머리 같은 '예쁜' 모습을 하나씩 잊어갔다. 같이 사는 남편을 보니 그래도 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임신 후 입덧을 겪으면서(유산으로 임신은 조기종결되었다) 3킬로가 늘어난 몸은 몇 개월째 현상유지 중이다. 평생 XS을 미덕으로 여겨온 내가 이제는 망설임 없이 M을 골라 집는다.


집어든 옷이 다 넉넉하고 내추럴했다. 특히 면 소재 옷을 좋아하는지라 후들후들한 옷에 둘러싸여 지냈다. '후리한' 모습이 마치 남편의 뱃살처럼 '기본값'이 되었고, 이제는 선크림도 귀찮았다. 얼굴은 제 때 세수해서 청결만 유지하는 정도로 지냈다.


그런데 지난주,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담선생님이 말했다.

"원래 이렇게 화장 하나도 안 하고 맨 얼굴로 다녀요?" 물음표를 한 다섯 개는 붙여야 할 만큼 격한 뉘앙스로 물으시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나를 공격한다는 위협도 느꼈다.


예의 아니냐고, 남자들이 수염을 면도하듯 여자들도 화장을 하는 게 사회적인 매너 아니냐고 하셨다.

'내가 화장을 안 해서 무례하다는 거야?' 거북하고 짜증이 났다.


이제는 안다. 뭐가 많이 거북할 때, 감정이 훅 일어날 때, 그건 나에게 중요한 일을 건드렸기 때문이란 것. 상대가 의도했건 아니건 나에게 중요한 화두일 수 있다는 증표라는 것.


한 주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한 뒤, 다음 주 상담에 가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선생님, 그런데 저번에 저더러 화장 안 했다고, 그거 예의 아니냐고 하신 거요. 저는 그게 공격받았다고 느꼈고 좀 화가 났어요. 그걸 오늘은 꼭 좀 해결하고 싶어요."


"사회적 가면이잖아요. 화장은 나를 숨기고 포장하는 중요한 기술이에요.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고, 더 믿음을 주기도 해요. 타인을 신경 안 쓴다면 모르겠지만,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분이 너무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요."


욱하고 올라온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으니 선생님 말도 일리는 있다.

뱃살이 있으면 안 된다,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얗고 몸매가 여리여리해야 한다, 같은 기준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꾸밈노동을 하라는 게 아니라, (물론 꾸미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있기야 하지만) 예쁜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거다.


"예쁜 건 좋은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거부반응을 보일 만도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납득이 갔다. 예쁜 건 좋은 거다. 아기나 강아지가 해사하게 웃는 젊은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을 종종 보았던 게 생각났다. 그래. 굳이 못생길 필요는 없다.


화장 안 한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전날 머리를 감고, 눈썹 가닥가닥이 완전히 자유롭게 나 있고, 머리를 질끈 묶고 아무 화장을 하지 않은 나는... 나 자신도 거울로 마주할 때 조금 아쉽기는 하다. 반면 머리도 보송보송하게 잘 마르고 눈썹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때, 그리고 잘 잔 얼굴에 선크림까지 발라놓고 보는 내 모습은 조금 더 마음에 든다.


그래. 너무 화내지 말고 아주 살짝만 외양을 정돈하자.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거나 숨쉬기 불편한 옷을 입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눈썹은 정리하고 얼굴에 있는 생기를 살짝 더 꺼내볼 마음은 있다.


올리브영에 가서 무려 1만 8천 원짜리 립스틱을 샀다. 너무 오랜만에 고르느라 땀이 날 정도로 힘들었다. 다 비슷비슷한데, 모순적이게도 저렴한 건 마음에 안 든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후보 세 개 중에 하나를 골라 남편에게 선물로 받아냈다.


실은 남편이 예쁜 모습을 좋아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꾸밈을 더 거부해 왔다. 자기는 뱃살관리 안 하면서 왜 여자 몸을 이렇게 좋아해? 자기는 머리가 10cm도 안 되면서 내가 커트하면 왜 얼굴이 굳지? 불만이 쌓이며 나는 온몸으로, 갈수록 사내다워지는 방식으로 투쟁해 왔다.


이제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더 나은 나의 삶을 위해서 이전보다는 나를 더 가꿔보려 한다. 남편이 좋아하니까 꾸미거나 안 꾸미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안타깝게도 새로 산 립스틱은 다시 발라보니 색상이 좀 아쉽다. 조금 더 분홍빛이 돌아야 내 피부에 잘 맞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안 바를 때보단 사람이 생기가 돈다.


이거 몇 그램 쓰려면 한 3년은 족히 걸릴 듯하다. 2028년 이다음 립스틱은 조금 더 마음에 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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