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크고 무거운 안녕, 엄마

by 김양현

뇌졸중


“엄마가 화장실에서 넘어졌어. 집에 좀 와야겠는데....”

2023년 2월 11일 아침, 아빠의 전화.

물어볼 걸 그랬다, 넘어진 건지, 쓰러진 건지.


내 기억 속 엄마는 항상 아픈 사람이었고, 짜증이 많았다.

몸이 약했고, 위병이 있었고, 난소암으로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고, 산에 갔다가 미끄러져 땅을 짚는다는 게 그만 양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어지러워 쓰러진 건지, 미끄러져 넘어진 건지, 뭔가 이상이 있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그랬으면 병원에 좀 더 서둘러 갔을 텐데....


병원에 도착하니 엄마는 이제 겨우 입원수속을 마치고 응급실에 들어갔다고 했다.

여든이 넘은 아빠는 눈도 침침한데 아무도 서류 쓰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속상함을 토로했다. 코로나19가 거의 끝나가는 시기였지만, 여전히 응급실에는 등록한 보호자 한 명만 출입할 수 있었다.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의식이 있었다는 엄마는, 내가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서둘러 왔으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남은 자식에게 불편함을 덜 주고 싶었는지, 어떤 배려였는지 엄마는 구급차에서 집 근처에서 큰 병원인 “OO구로병원으로 가자.”라고 했단다. 환자가 의식이 있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라 모두 심각성을 덜 느꼈지도 모르겠다.


“이미 자발호흡이 어려우니,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의사가 말했다. 소식을 들은 남편도 병원에 도착하고, 엄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루 한 번 허락되는 중환자실 면회.

아빠와 내가 번갈아 면회했고, 하루는 조카들과 새언니가 왔고, 의사는 그 짧은 30분의 면회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장기기증을 이야기했다.


“무슨 일 있으면 호출할 테니, 멀리 가지 마세요.”

중환자실 면회가 익숙해지기도 전, 입원한 지 닫새 만에 엄마는 그렇게 가셨다. 더는 몸에 기계를 달아놓는 게 의미 없다고 했고, 연명 치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잔병치레 많은 사람이 오래 산다는데, 돌아가시는 길은 어째 그리 서둘러 가셨는지.


“평생 고생만 한 사람, 장기 기증은 못 하겠어요. 내가 죽으면 그때 다 가져가세요.”

마지막으로 엄마를 지키고 싶었던 아빠의 말이었다.



오빠랑 같이 있어서 행복해?


세 살 터울 오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독히도 싸워서, 엄마는 '내가 울어야 하루가 끝나는가' 싶었단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심하게 싸워 3년 정도 서로 말을 안 한 적도 있었다.


결혼하고 조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오빠의 꿈은 교사였다.

당시 우리 집과 오빠 집은 가까웠고, 부모님이 조카들을 돌봐주었기에 오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집과 저 집을 오갔다. 우리 집은 살짝 오르막에 있었는데, 오빠가 집에 올 때 어깨가 아프고 숨이 차다는 말을 자주 했다.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하고, 일하고, 살림하느라 바빠 운동할 시간이 없었나?’ 마음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서로를 걱정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충고하고 조언하는 성격이었던 우리. 나는 오빠에게 대수롭지 않게 “운동해!”라고만 말했다. 그땐 젊은이의 건강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큰 병원에 가보세요. 꼭 가보셔야 해요.”

상태의 심각성을 스스로 느꼈던 건지, 검사하러 갔던 병원에서 의사가 울먹이며 오빠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진단은 *폐선암 4기, 장기 전이.

아직 삐약거리는 조카들과 살려는 의지 때문인지 오빠는 그렇게 3년을 더 살았다.


“어떻게 사십밖에 못 살고 가니....”

오빠가 떠난 이후 엄마는 자신이 아들을 약하게 낳았다고 생각하고 계속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자식인 내가 상주가 되었다.

아빠가 꿋꿋하게 버텨주었고, 나는 사소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이런 저런 결정을 해야 했다. 슬프지만 슬퍼할 여유가 없었고, 내가 슬퍼하면 아빠가 더 슬플 것 같아서 참았다.


오빠는 하늘나라에서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고, 엄마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들과 함께 있을 테니까 오빠도, 엄마도 외롭지 않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 편히 쉬세요.


“엄마가 없는 삶은 어떤가요?”

멘토에게 물었다.

“저도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아.... 나이가 많다고 모든 것을 먼저 경험하는 것은 아니구나!


언젠가 연기자 박시은 씨가 대학생 아이를 입양하면서, “언제나 엄마가 필요했고, 40대가 된 지금도 엄마가 필요하다.”라고 한 말이 참 인상 깊었다.

엄마가 없어도 괜찮을 때가 과연 올까?




내가 죽은 후에는…


둘째 큰아버지 내외가 방문하여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는 큰 숨을 내쉬며 누웠다. 심장마비였다.

할머니가 너무나 정정하셨던 데다, 효자였던 아빠는 할머니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 친구, 지인분들께 꽤 많은 돈을 빌려주셨다는 것을 짐작할 뿐, 차용증 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오빠의 죽음 후, 우리 가족은 ‘내가 죽은 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부부 사이에도 재산은 비밀로 해야한다지만, 연명 치료나 봉안당, 장기 기증, 재산,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에 관해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연기자 신애라 씨는 어머니 유품 정리를 하면서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죽은 후,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남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고, 즐겁고 행복한 추억으로 나를 이야기하면 좋겠다.




지독한 남아선호


어릴 적 우리 집은 아파트 6층이었다.

엄마는 창밖으로 양쪽에 아들 손을 잡고 지나가는 부인네가 그렇게 부러웠다고 했다. 아들인 줄 알았더니 딸이 태어났다며, 살림도 못 하고 무뚝뚝한 쓸모없는 계집애라고 참 많이 구박했다. 내 성별을 내가 선택해서 나온 건 아닌데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오빠 옷을 물려 입었고, 오빠만 미술학원에 다녔으며, 뭐든지 아들이 먼저였고 최고였다. 빨래를 개키면 남자 옷은 여자 옷 위에 놓아야 했고, 남자 옷을 건너 다니지 못했으며, 뜨거운 밥과 맛있는 반찬도 항상 아빠와 오빠가 우선이었다.


“엄마 계모야?”

“그래, 네 엄마 찾으러 가라.”

“어디로 가야 돼?”

“다리 밑에서 주워 왔으니까, 다리 밑으로 가봐라.”

당시 우리 집은 복개한 청계천 앞이었는데, 청계천이 지금 같은 모습이었으면 진짜 모든 다리를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네 집 딸은 월급봉투를 통째로 갖다 준다는데.”

“누구네 집 딸은 여행 간다니까 백만 원씩 턱턱 용돈 준다는데.”

“여태껏 키워줬으니 한 달에 얼마씩 갚아라.”

아들만 위하면서도 엄마는 이런 말을 수십 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해댔다.


엄마의 잔소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엄마랑 싸우는 게 지긋지긋했던 나는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싶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아들을 좋아했을까?

오빠가 죽고 난 후에 엄마는 "나는 아들도 없다."라며 목 놓아 울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 죽음


어느 집이나 장남에 대한 기대는 클 것이다.

엄마는 유난히 아들을 좋아했고, 아빠도 장남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나에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라면서 아들과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이런 아들이었기에 오빠가 하늘나라로 간 후,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참 많이 했다. 나는 여자이고, 딸이고, 결혼도 안 했고, 자식도 없고, 비전도 분명하지 않은데, 왜 내가 아니고 오빠였을까?


어릴 적 신년사주를 보면, 나에게는 항상 “물조심해라, 차조심해라, 사람조심해라. 명이 짧다.”라며 온갖 부적을 써주더니 그게 다 거짓이었나 보다.


교생실습을 할 때는, 이 자리에 나 말고 오빠가 있었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 힘들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같다? 아니 같지 않다. 다른 이의 삶은 돈으로 살 수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러기에 더 열심히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는 7남매 중 맏딸이 아닌, 큰딸이다.

어릴 적부터 공장에 다니며 오빠와 남동생들 학비를 대고 살림을 보탰다면서 배우지 못한 설움, 여자라서 겪는 설움을 자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대학 떨어지면 “계집애는 재수(再修)없다. 당장 공장 보낼 거야.”라고 겁을 줬다.


어떤 딸은 엄마 입속의 혀 같다고 하지만, 우리 모녀는 전생의 원수처럼 싸우는 존재였다.

오죽하면 엄마 앞에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했을까. 살면서 그 말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 깨달았지만, 끝끝내 사과하지 못했다.

사십 년 동안 내가 함께 살았던 엄마는 아팠고, 우울했고, 화가 많았다. 아들을 잃은 후에는 슬프고, 슬펐다.


제 마음대로만 산다고 생각했던 딸이 뒤늦게 결혼한다니, 며느리와 아내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에 동정심이 생겼는지, 아니면 매일 만나지 못해 그리움이 생겼는지 그제서 조금은 누그러져, 친하게 지냈던 시절이 겨우 몇 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의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얼마의 인연이 있어야 가족으로 태어날까


아들을 좋아하는 엄마,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딸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렸고, 꼬맹이 딸이 비를 맞을까 코트 자락 안에 넣고 감싸안은채 함께 집에 걸어간 기억이 있다. ‘OO금지 10계명’이 있을 정도로 힘들다는 가족 여행도 여러 번 다녀왔다.


불교에서는 옷깃 한 번 스치는 인연은 500겁, 부부의 연은 7,000겁, 부모 자식의 연은 8,000겁의 인연을 쌓아야 된다고 한다는데, 좀더 일찍 철들고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가졌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점점 엄마를 닮아가는 딸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이가 들수록 얼굴과 체형이 점점 엄마를 닮아간다.


내가 태어날 무렵,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 생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호적엔 11월로 되어 있는데, 어떨 때는 9월이랬다가 또 어떨 때는 10월이랬다가 자꾸 말을 바꿔서, 어른이 된 후에도 친엄마가 맞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닮아가는 모습을 보니 친엄마가 확실하더라!


‘이번 생은 처음이라’,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 ‘어른이 되어도 똑같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서, 그리고 내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 보니, 엄마가 왜 그때 그랬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더라. 그래도 여름날 부추 부침개가 먹고 싶다고 할 때 짜증내지 말고, 머리 쥐어박지 말고, 네가 해먹으라고 하지 말고 좋은 마음으로 부침개를 만들어 나눠먹었으면 서로 좋았을 텐데. 엄마도 나에게 서운한 게 참 많았겠지?





가족과의 이별 후


나는 몸치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롤러스케이트, 자전거, 캐치볼, 수영 같은 활동을 배우거나 해 볼 기회가 없었고, 엄마가 이런 운동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한창때는 아빠와 함께 관악산, 도봉산, 북한산을 날아다녔던 엄마는, 어느 날부터 무릎이 아프다며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라는 생각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강화도, 설악산, 제주도 등 곳곳으로 여행 다녔지만, 엄마는 관광지에 가서도 주차장 근처에서 사람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늦게나마 가족여행을 다녀온 것은 두고두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빠가 하늘나라로 간 후에는 바로 차를 샀다.

가족 모두 운전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나만 유일하게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는 ‘어차피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살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죽을 때 못 해본 것을 후회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가족과의 이별은 사람을 철들게 만든다.

가족 모두가 건강했다면, 나는 여전히 괜찮은 회사의 성실한 구성원으로, 매일 열심히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나의 건강과 행복을 우선시하고, 자주 여행하며 자연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 전 세계를 다 가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는 구석구석 돌아다녀 봐야 하지 않겠나. 누구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느냐?’고 하고, 또 누구는 ‘목돈 만들어서 좀 더 좋은 데로 가자!’고 하지만, 나는 오늘이 소소하게 즐겁고, 가까운 곳에 다녀도 행복하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고, 언제든 더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대하는 태도


아빠는 우리 가족 중 가장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분이셨지만, 가족에게는 참 보수적이었다. 내 나이 서른까지도 통금 시간이 있었고, 외박은 사절이었으며, 화장과 옷 색깔, 치마 길이까지 일일이 엄마가 참견할 정도였다.


오빠의 죽음 후 엄마는 "나는 아들도 없다."라며 통곡했지만, 아빠는 제대로 표현도 못 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방광암이 발병했다. 곧 완치되긴 했지만, 첫 상실의 쓰나미는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홀로 지내고 계신다.

어릴 적 “아빠랑 결혼할래!”라며 아빠를 따르던 딸은, 이제 바쁘다며 한 달에 한 번이나 얼굴을 비친다. 여든이 넘은 아빠는 언젠가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러기엔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두 집을 정리하고 교통 편리하고 병원이 가까운 단독주택을 찾아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또 이 순간을 후회할까봐, 아빠의 말씀이 계속 신경 쓰인다.


가끔 ‘남편이 아프면, 뭐가 중요하겠나.’, ‘내가 아프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왜 연로한 부모님의 일은 항상 뒷전이 되는 걸까? 언젠가 엄마에게 “아빠 걱정은 마셔. 내가 잘 살피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해서 자식 공부시키고, 부모님 봉양하는 걸 당연하다고 여겼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방향과 보람이 있듯, 아빠에게도 현재와 앞으로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좋겠다.





우리는 오늘을 또 살아간다


연인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어져 괴로운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장례식에서 내가 덜 아프고, 덜 슬플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 오빠가 아프지 않아서, 엄마가 오빠가 함께 있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누구나 부모가 있고, 시기는 다르지만 부모와 가족의 죽음을 맞게 된다.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장지나 봉안당을 찾는 것은 남은 사람을 위한 행위이다. 우리의 뿌리를 기억하고, 애정을 확인하고, 또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부모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열심히, 정직하게 나는 또 하루를 산다.


엄마, 사랑해!

아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025. 06. 26.

당신들의 딸 양현




프롤로그


일심동체라는 0촌의 배우자는 좋고 싫음을 결정해 결혼할 수 있고, 헤어지면 다시 남이 됩니다. 1촌 사이의 부모자식 관계는 선택할 수 없죠.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더욱 특별한 존재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부모님과의 이별.

그 이별이 너무 슬프지 않기를 바라며, 이 책의 이야기가 이미 경험한 분들께는 ‘나도 그랬지.’라는 위안이 되기를, 앞으로 이별을 준비할 분들께는 소중한 추억을 더 많이 만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솔직하게 쓴 건 아닌가 도중에 생각도 많았지만, 고생 많았던 우리 엄마를 주인공으로 책 한 권은 꼭 써주고 싶었습니다.



에필로그


아기 때는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예쁘다, 잘한다 칭찬받는데, 우리는 왜 자라면서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될까요?


소녀가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딸은 점점 더 엄마를 닮아가고, 딸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는 자기처럼 사는 딸을 안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애증의 관계.

많은 엄마와 딸의 모습이 아닐까요?


물이나 공기처럼 평소엔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다가 비로소 그 존재가 사라지면 내 안에서 큰 것이 쑥 빠져나간 듯 허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게 부모님과의 이별인 것 같습니다.


남자친구(지금의 남편)가 다정하게 통화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인지 물었는데 “엄마”라 대답했을 때, 저희는 서로 의아했습니다.

“엄마한테 그렇게 다정해?”

“엄마니까 다정하지.”


여러분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요?

어떤 존재이든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오늘, 더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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