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이 좀 많긴 했지만 쉬지 않고 7시간 수다를 떨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오늘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과 아무 일 없이 이 시간까지 말만 했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여의도 한복판 어느 사무실서 치킨 한 마리, 피자 한 판, 그리고 싸구려 와인 몇 병을 먹어치우며 우리는 돈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학 때문에 재수를, 숫자를 피해 오로지 한글로만 밥벌이를 하는 내게 숫자놀이에 능한 그는 이성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고리타분한 지식과 논리 싸움을 최고로 여기는 동종업계와 달리, 매일 돈만 생각하는 그 사람의 직업이 내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해본 심리 테스트에선 나는 극단적인 '위험 회피형' 진단을 받았다. 대학교 땐 택시 타는 게 무서워 지하철만 끊겨도 24시간 카페서 첫차를 기다렸고, 남들은 주식으로 치킨값 벌 때 이자율 특판 상품을 찾아다니며 저축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뿐만 아니라 25살이 넘자 사회적 나이에 맞는 역할 수행을 위해 변변찮은 회사에 입사, 학자금을 갚으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던 나였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대학 때 주식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2점대 샤프심 학점을 받았고, 공모전을 통해 토익 점수도 없이 특채로 회사에 입사했다. 자기소개서를 100장 넘게 썼던 나와 달리, 1장의 자기소개서도 써본 적 없다고 했다. 글 쓸 일은 별로 없고, 글 읽을 일은 기업IR 자료 소개서뿐이란다. 퇴사를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퇴사를 감행했다고 했다. 가장 싫어하는 건 주말, 공휴일, 워라밸이란다. 왜냐고 물으니 "돈 벌 수 없어서"라는데, 그러면 언제 쉬냐는 질문에 돈 많이 벌고 싶다면서 왜 쉬려고 하느냐는 꼰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오묘한 매력이었다. 내 기준 샤프심 학점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토익 점수 800 이하는 말도 안 되는 사례였는데, 저 사람은 모든 걸 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실한 건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에 딱 맞는 인생 커리큘럼이랄까.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주식 동아리에 미쳤고, 미치다 보니 공모전에서 수상.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젠 따뜻한 온실인 회사를 뛰어나와 돈맥(金脈)을 본격적으로 훑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잘 몰랐다. 그와 함께 죽음의 계곡 근처에서 돈과 J커브를 이야기하게 될 줄. 깜깜한 동굴 속에서 오직 돈 냄새에 의지해 방향을 같이 살피고 지팡이를 함께 두드리게 될 줄 말이다. 지인들은 지금도 내게 물어본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함께 할 거냐"고. 난 그때마다 잠시 머뭇거린다. 그래도 답한다. "후회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