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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09. 2022

공포의 극복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들은 학교괴담이나 공포체험 따위의 아동용 무서운 이야기 서적 속에서 본 내용들이 떠오를 때면 화장실 문을 닫고 씻지도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다. 눈을 감고 머리를 감으면 어디선가 귀신이 나타나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아 따가워지는 것도 감수한 채 뜬 눈으로 머리를 감았다. 잠들기 위해 누운 채 행여나 이불 밖으로 나온 신체부위를 유령이 해코지 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손발을 이불로 꽁꽁 싸맨 뒤 얼굴마저 이불속으로 밀어 넣고 무서운 생각을 애써 떨쳐가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부모님께서도 이런 내가 확실히 겁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어디선가 '제사를 지내고 난 뒤 태운 지방을 물에 띄워 마시면 겁이 없어진다더라' 는 말을 듣고 내게 권한 적도 있다. 어린 나는 그 말에 솔깃하여 정말로 까만 재가 둥둥 떠다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었다. 불행히도 효과가 즉각 나타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렇게 겁이 많았으면서도 무서운 것들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괴담들, 추리만화(당시의 나에겐 추리만화 속 살인사건의 내용과 그림체도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 봐도 어린 시절에는 충분히 무서울 수 있었겠구나 싶은 것들도 분명 있다.), KBS에서 방영해주던 전설의 고향,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 등을 두루 섭렵했고, 그렇게 공포를 유발하는 매체들을 접하고 나면 또 후회하며 밤잠을 못 이룰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 흥미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겁이 많은 것’과 ‘겁을 집어먹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흥미’는 별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부끄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도 나는 겁이 많았다. 어느 날 집중이 잘 되어 열 시에 끝나던 야간자율학습을 한 시간 더 하고 집에 가기 위해 혼자 있던 5층의 교실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모든 불이 꺼져 있고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그 어둠을 마주하는 순간 공부에 집중했을 때에는 찾아오지 않았던 공포가 불현듯 밀려왔다.


나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탁탁탁 실내화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그 어두운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오던 중 벽에 걸려 있던 고흐의 자화상 그림이 유난히 무섭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숨을 몰아쉰 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다시는 교실에 혼자 남아 공부하지 않았다.


다행히 대학교에 다니며 밤을 즐기는 방탕한 삶을 살면서 나의 겁은 차츰 힘을 잃어갔다. 공포심을 느끼던 순간들이 가끔, 하지만 여전히 있었지만 그런 순간마다 나의 과민했던 반응이 차차 둔감해지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년 뒤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는 무서움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불빛도 없는 새벽에 산을 타며 순찰을 돌 때에도, 같이 보초근무를 서던 선임에게 부대의 괴담을 들을 때에도, 혼자서 차가운 건물 안에서 당직근무를 설 때에도 무서움보다는 피곤함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의 성장이 멈춘 뒤에도 나의 담력은 어린 시절의 모자랐던 성장을 뒤늦게 보상하기라도 하듯 계속 성장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마주하지 못하던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공포영화다. 아무리 겁이 없어져도 공포영화를 굳이 찾아서 볼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할 정도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집에서 혼자 머물던 중 뜬금없는 바람이 불어 알 수 없는 도전정신이 내게 깃들었고, 그리하여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제법 많은 공포영화를 찾아내어 시청했더랬다.


영화를 보면서 공포심이 들긴 했지만 분명 그 정도가 심하진 않았고,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거실에서 덮고 있던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올리며 언제든 눈을 가릴 준비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가린 적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제법 훌륭한 태도를 가진 영화관람객이었고, 무서운 장면을 떠나서 나름대로 영화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드디어 나는 마지막 단계를 극복해낸 것이다.


다시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면, 나는 눈을 감을 때 귀신이 나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잠이 들면 유령이 나타나 나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나의 뒤를 쫓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사실을 지금은 잘 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에 공연히 공포를 느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공포심에 이성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공포란 무지에서 온다고도 한다. 이 말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현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는 까닭 모를 두려움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들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포에 대한 나의 극복과정이 결국 조금이나마 성숙해진 이성적 사고에 그 바탕을 둔 것 같기도 하여 별 것 아니지만 약간은 뿌듯해지기도 한다. 어리석게도 그 어릴 적 마셨던 물이 이제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떠오르기도 하지만, 다시 한번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 보면 그 물은 역시나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고작 타고 남은 종이 따위가 내게 그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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